100%
주의 회복 · 신약 용어

회복역 용어사전

신약 회복 용어 125항목

【 】 로 표시된 단어들은 워치만 니 형제님과 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메시지 중에서 인용한 것이며,

( ) 로 표시된 단어들은 여러 성경들의 각주에서 옮겨왔습니다.

간구

懇求

기도는 일반적인 반면, 간구는 더욱 특정한 것이다. 물론 기도나 간구 모두 교통이다. 그러나 간구는 당신이 어떤 것을 위하여 기도할 특별한 부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오직 한 가지만을 위하여 주님께 간구할 부담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기도’와 ‘간구’라는 말은 에베소서 6장 18절과 빌립보서 4장 6절에서 사용된다. 기도가 먼저 언급되고 간구가 나중에 언급된다.

— 활력그룹의 긴급한 필요에 관한 교통 Ⅲ 36

거함

abiding

거한다는 것은 체류하며 머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어떤 장소 안에 거주하며 거처를 정하는 것이다. 신성한 삼일성 안에 거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 곧 우리의 매일의 생활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삼일 하나님 안에 거주하며 삼일 하나님 안에 거처를 정하며 삼일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이다.

—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신성한 삼일성과 함께 삶 127

그리스도가 유기체인 포도나무이시고 지금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고 있다. ‘거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는 체류하거나 머무르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거처를 가지다’ 또는 ‘거처를 정하다’의 의미이다.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동일한 단어가 명사로 사용되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의 아버지의 집에 많은 거처가 있음 (2절) 과 그분이 그의 사랑하는 자들과 거처를 함께 하려고 오실 것임을 (23절) 을 말씀하셨다. 거처는 거주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거한다는 것은 집 안에서 사는 것이다.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거처로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신성한 삼일성과 함께 삶 118

건축

建築 building

신약에서의 건축에 대한 개념은 우리의 천연적인 개념과 매우 다르다. 건축에 관한 우리의 천연적인 개념은 고충 건물이 되기까지 어느 한 재료가 다른 재료 위에 차곡차곡 쌓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은 건축이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재료를 쌓아 올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께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건축이 단지 함께 모이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함께함은 건축이 아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와 함께 앉아서 개인적인 일들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함께함이다. 건축은 단지 함께 모이는 것만이 아니다. 곧 쌓아 올려지는 것만이 아니다. 신약에서의 건축은 생명 안에서의 성장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행하거나 일하거나 활동하거나 행동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한 가지, 곧 생명 안에서의 성장으로 완결된다. 우리는 모두 성장해야 한다. 자라남이 진정한 건축이다.

— 육체와 영 82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자람으로써 그리고 그 몸이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함으로 완결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이 일종의 자가 (自家)- 건축 (self-building) 임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이 그 몸의 건축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몸이 최종적으로 건축되는 것은 모든 지체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자람으로써 이다. 이것이 그 몸이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하는 것이다.

— 하나님 - 사람들 40

그리스도의 몸은 집을 짓듯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과 같다. 집은 먼저 터를 닦고, 그 다음 골격을 세우고, 그런 다음 한 조각씩 돌을 쌓아서 건축된다. 그러나 우리 몸은 그렇지 않다. 출생하자마자 사람은 사지를 갖추었기 때문에 거기에 필요한 것은 성장이다. 건축은 양육을 통해 이루어진다. 몸은 양육을 얻음으로 점점 자란다. 이 자람이 바로 몸의 건축이다. 몸은 밖에서 건축한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자라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은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인데, 에베소서 4장 13절은 이 성장을 위해 모든 사람이 장성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장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한다. 성장이 바로 건축이다.

—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된 영과 믿는 이들의 거듭난 영의 연합의 결과 68

결정

結晶 crystallization

結晶體, 晶出, 구체화

결정이라는 말은 본질에 근거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조각의 금속은 밖의 모양은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모양 안에는 내적인 요소가 있으며, 요소 안에는 본질이 있다. 결정이라는 말은 바로 이 본질에 근거한 것이다. 오렌지의 본질을 알려면, 그 내용물을 보기 위해 껍질을 벗겨 내야 한다. 먼저, 당신은 요소를 볼 수 있으며, 그런 다음 그 요소 속에 본질이 있다. 우리에게 자양분을 주는 것은 바로 그 본질이다. 성경연구에서 결정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본질을 보기 위한 것이다.

— 로마서에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결정 13

겸비

lowliness

겸비 (lowliness) 는 겸손 (humility) 과는 다소 다르다. 어떤 사람은 기꺼이 낮아지지 않고도 겸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높아지기를 갈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겸비한 사람은 그의 겸비함 안에서 겸손하다. 그의 겸비함 안에서 그의 겸손을 볼 수 있다. 겸비하게 된다는 것은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반대에 직면했을 때 주님께서는 마음 안에서 낮아지셨다. 그분은 자신을 위한 어떤 것도 하기를 원치 않으셨으며, 자신을 위한 어떤 것을 얻기를 기대하지도 않으셨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복종시켰다. 그러므로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분은 마음 안에 안식이 있으시다.

—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510

경건

敬虔 godliness

경건은 단지 경건스러운 것 (piety) 일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살아 나타내는 생명이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접미사 ly 는 본성과 태도와 그 겉모양에 있어서 같은 것을 의미한다.

— 디모데 전서 3:16 참조

생명이신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살아 나타나시는 것을 말한다. 경건은 하나님이 사람 되시고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 하나님 - 사람들 17

사실상 경건은 ‘하나님 같음’ (God-likeness) 이다. 경건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같이 되는 것,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서 경건은 하나님을 살아 내는 것을 의미한다.

— 생명에 대한 기본 공과 255

경건은 신성한 생명의 생활이다.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은 우리의 생활이 되는데, 그것이 곧 경건이다.

— 야고보서 결정연구 75

경륜

經綸 economy

‘경륜’이라는 단어는 ‘가정 행정’을 의미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미아’ (oikonomia) 에서 왔다. 그 단어는 또한 청지기 직분, 행정, 분배의 의미를 포함하는데, 즉 분배의 과정을 의미한다. 성경 전체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빛 안에서 볼 때, 하나님의 경륜은 교회를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해 하나님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는 하나님의 신성한 행정을 가리킨다.

— 진리의 변호와 확증 161

경륜적인 삼일성

삼일 하나님의 계획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분의 움직이심을 위한 것임. 에베소서 1장 3절부터 14절은 경륜적인 삼일성이 있음을 분명히 언급한다. 하나님의 경륜적인 삼일성은 세 단계가 있다. 먼저 아버지는 계획하셨고 (엡 1:4-6), 아들은 완성하셨으며 (7-12절), 그 영은 아버지의 계획을 따라 아들이 이루신 것을 적용하신다 (13-14절).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그분의 영원한 뜻을 이루기 위한 연속적인 절차이다.

— 오늘날 주의 회복의 주요 항목들의 중점

경쟁

競爭 rivalry

‘경쟁’은 ‘경합’ (competition) 과는 다르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경합을 벌인다. 운동 경기에서 운동 선수들은 경합을 벌인다. 경합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경쟁은 악한 것이다. 경쟁은 소극적으로 서로 겨루는 것이다. 누군가 좋은 간증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성도는 그보다 더 나은 간증을 하기를 바랄 수 있다. 어떤 성도는 세 사람을 회복 안에 데려올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성도는 이것을 보고 여섯 명을 데려오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만일 당신이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아지고 훌륭해지고 더 많이 갖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경쟁이다. 경쟁은 육체에 속한 것이다.

— 봉사에 대한 기본 공과 256

과정을 거친

processed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산출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길고 긴 과정을 거치셨다. 이 과정을 거치심은 성육신, 인생, 십자가에 못박히심, 장사됨, 부활, 생명주는 영이 되심을 포함한다. 이 생명주는 영은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이시다. 이 “Processed" 라는 단어는 아주 번역하기 어려운데, ‘요리되다’도 아니고 ‘처리되다’도 아니다. 우리는 정말로 그것의 영적인 의미를 전달할 더 합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어서 우리의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분께서 이렇게 과정을 거치신 이유는 교회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영원 안에 계신 어떤 과정도 거치지 않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 분은 각종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어떠한 발명이 아니고 성경의 계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어떠함에 대하여 주관적인 인식과 체험이 있으려면 반드시 이러한 계시를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기묘한 어떠하심은 우리와 그다지 관계가 없고 교회는 쉽게 사회의 조직으로 되어 버린다.

— 그리스도의 기묘한 어떠하심과 하나님의 생명의 구원 53

관용

寬容

관용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기꺼이 침해 받으며 고통과 손상을 겪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온유함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침해하지 않고 그들에게 양보하는 것이다. 온유와 관용은 그리스도께서 신성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인성 안에서 사신 두 가지 미덕들이다.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서 관용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두 개의 단어 에피 (epi) 곧 “위에 (unto)”를 의미하는 전치사와 에이코스 (eikos) 곧 그럴듯한, 맞는, 적당한 이라는 두 개의 단어로 구성된다. 에피 (epi) 라는 전치사가 접두사로 다른 헬라어 단어들에 더해질 때, 그것은 종종 충만한 혹은 확장된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 단어의 의미는 완전히 합당하고, 가장 완전한 정도로 적합하고 타당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온전하고 광대한 온당함과 사려성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그분은 언제나 가장 완전한 정도로 적합하고 합당한 방법으로 행동한다. 관용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다양하게 번역된다. 어떤 번역을 그 단어를 순종 (yeildingness) 으로 번역한다. 중국어 번역에 사용된 단어는 겸손하게 양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해들은 정확하기 하지만 다소 낮은 이해이다. 다른 번역자들은 그 헬라어가 합당한, 사려 깊은, 적당한 및 적절한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관용하는 사람은 항상 알맞고 그의 행동이 항상 적당한 사람이다. 관용의 미덕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사랑, 친절, 긍휼, 평강, 온화함, 점잖음, 합당함, 조화하는 능력 등 많은 다른 미덕들을 포함한다. 우리가 합당하고, 사려 깊고, 적절할 수 있다면, 우리는 또한 점잖고 친절하고 온화하며 평화스럽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온유하고 적당하며 다른 이들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충만할 것이다. 관용의 반대는 엄격한 방식을 따라 하는 것이다. 관용이 결핍된 사람은 엄격하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요구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관용한다는 것은 우리의 권리에 미치지 않아도 쉽게 만족하는 것을 의미한다. 알포드는 관용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법적 권리들과 관련하여 엄격하게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인간의 미덕들 전체를 요약한 최상의 단어는 관용이다.

—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509

교만

驕慢

자기를 높이고 자신을 도달하지 않은 곳에 두는 것으로서 이름이 실제를 능가하는 것을 말한다.

— 워치만 니 전집 6권 126

교통

交通 fellowship

교통이란 첫째로는 서로간의 의사소통을 의미한다.

둘째로는 상호 참여, 공동 참여로서 공동 누림을 갖는 것을 말한다. 신약은 이 교통을 잔치로서 표현한다. 복음서에서 주 예수님은 잔치가 준비되고 사람들이 거기에 초대받았다고 말씀하셨다 (마 22:1-3, 눅 14:16-17). 우리는 이 잔치에 참여하여 누림을 갖는다. 공동의 누림을 갖는 것은 무엇인가를 공동으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이 공동 누림은 상호 누림이며 상호 참여이다. 이러한 교통은 교제 (交際) 를 포함한다.

셋째로 교통은 서로간의 의사소통과 공동 누림을 통하여 생명공급을 가져오는 것이 교통이다. 우리의 교통은 생명공급이 있어야 한다. 생명이 없는 교통은 무의미하다.

— 고린도전서 L-s

교통이란 우리가 받은 그 생명의 흐름이다. 단순히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의 흐름이다. 멈춘 상태에 있을 때는 생명이고, 흐르고 있을 때는 교통이다. 교통은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을 통과하며 흐르는 생명의 흐름이다.

— 요한일서에 나타난 일곱 비밀 13

교회

엡 1:22-23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시키시고, 그리스도를 만물 위의 머리가 되게 하시어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입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 각주중에서 ; ‘교회’라는 용어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이며, ‘부름받아 나온 회중’ 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나온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로 이루어진다.

구변

口辯

에베소서 6장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가 구변을 가질 수 있도록 그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으며, 골로새서 4장 3절은 그곳의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구변의 문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해 줄 것을 당부했다. 구변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로고스 (logos) 이다. 영적인 영역 안에서 말하는 것은 유창함의 문제가 아니라 구변의 문제이다. 어떤 사람이 매우 말을 잘하고 유창할 수 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분배하지 못할 수 있다. 또 한 사람은 어떤 것들을 서투른 방식으로 표현할지 모르지만, 그의 서투른 말함 안에서 그 영이 분배된다 (고후 3:6). 이것이 성경상의 구변, 곧 말씀 (the logos) 이다.

— 장로훈련Ⅲ

구속

redemption

구속이란 원래 갖고 있던 것을 잃어버렸을 때 값을 지불하고 다시 그것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떤 책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값을 지불하고 산다면 그 책을 구속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속이란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소유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소유였다. 그러나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다시 찾으셨다. 막대한 대가로 우리를 다시 얻으신 것이다. 이것이 구속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되어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과 영광에 있어서 하나님과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요구들은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값을 지불해 주셨으며 우리를 다시 소유하셨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구속을 이루신 것이다.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한 영원한 구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 로마서 L-S 69

Cf. 구속과 구원의 차이

구속이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것이다. 이 구속이 우리에게 적용될 때,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된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구속을 적용한 것이다.

—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109

권위

權威

권위란 다스림에 있어서의 능력이다. 권위라는 신성한 속성에 있어서 주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게헨나로 던져 넣을 권위를 갖고 계신다. 제복을 착용한 경찰관은 능력과 권위의 차이를 설명해준다. 비록 경찰관이 그다지 많은 힘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교통을 정리할 권위를 갖고 있다. 반대로 권투선수는 경찰관보다 훨씬 더 힘이 세지만 어떤 권위도 갖고 있지 않다. 권위는 능력보다 더 큰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권위와 능력을 다 갖고 계신다.

— 신약의 결론, 하나님 146

규례

율법은 첫째로 십계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율법의 근본인 십계명은 간단하고 짧고 분명하다. 간단하기 때문에 십계명은 해설과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율례와 규례는 십계명에 대한 해설이며 부연설명이다.

— 레위기 20:22 참조

규례는 율례와는 다르다. 율례는 심판을 포함한 규례이다. 그러나 규례, 규정은 심판을 포함하지 않는 단순한 규례이다. 레위기 18장부터 20장까지에는 심판을 포함하지 않는 규정들이 있으며, 이러한 규정들이 규례이다.

— 레위기 L-S 485

계명은 기초되는 율법이고, 율법의 세부사항은 규례이며, 법도가 들어 있는 규례는 율례인 것이다. 출애굽기 21장부터 23장에서 십계명의 세부 사항들과 보충이 되는 많은 규례에 관한 규례가 있다. 이 규례에는 법도가 들어 있지 않다. 신명기 4장에서 모세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킬 것을 분부했다

— 신명기 L-S 456

그리스도의 몸

엡 1: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입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 각주 ;

[1] 그리스도의 몸은 조직체가 아니라, 머리이신 분의 표현과 활동을 위해 거듭난 모든 믿는 이로 이루어진 유기체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산출하신 것이며, 그리스도는 이제 교회 안에 들어와 계신다.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전달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고, 그 결과 그분의 몸이 산출된다.

긍휼

矜恤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들 가운데 가장 멀리까지 이르는 것이다. 긍휼은 은혜보다 더 멀리까지 간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은혜만큼 멀리 미치지 않으며, 그분의 은혜는 그분의 긍휼만큼 멀리 미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좋은 상태에 있고 내 위치가 당신의 위치와 일치되었을 때 당신이 내게 선물을 준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가련한 상태에 있고 내 위치가 당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데 당신이 내게 무언가를 준다면 그것은 긍휼이다. 은혜는 오직 그것에 부합되는 상태에까지만 이르른다. 그러나 긍휼은 더 멀리까지 나아가서 가련하여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상태에까지도 이르른다. 우리의 천연적인 상태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쫓겨나 있으며 그분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 우리는 오직 그분의 긍휼을 받을 자격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사람의 좋은 상태에 달려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은 사람의 가련한 상태 속에서 보여진다. 그것은 그분의 은혜를 초월하여 미친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를 그분의 은혜 안으로 인도하셨다. 이런 이유로 히브리서 4장 16절은 먼저 우리가 긍휼을 얻어야 하며 그런 뒤 때에 알맞은 도움을 얻기 위해 은혜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만큼 그분의 긍휼을 보배롭게 여겨야 한다. 우리로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항상 그분의 긍휼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그분의 은혜는 둘 다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가 비참한 상태에 있을 때 그분의 긍휼이 우리에게 이르러서 그분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상태로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

— 신약의 결론, 하나님 125

기질

氣質 disposition

본성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창조하신 그 본질을 가리키며, 기질은 소극적인 방면에서의 우리의 삐뚤어진 성질과 굽은 개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지은 본성은 원래 좋은 것이었으며, 그것이 우리의 원래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타락한 우리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은 삐뚤어지고 굽은 개성이 되어 버렸다. 굽지 않은 개성을 가진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말할 때는 소극적이 방면의 기질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하는 그 영 메시지 2

미덕

美德 virtues

미덕이란 어떤 속성의 탁월한 표현이나 탁월한 행위를 지칭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이러한 탁월한 속성들을 수행할 수 잇는 능력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덕은 일종의 생명 능력이다. 누가복음 8장에서 한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분에게서 미덕이 흘러나가 그 여인을 치료했다 (46절) 그 미덕은 일종의 능력이었다.

변형

變形 transfiguration

생명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절정에서 우리 몸은 변형되어 주님의 영광의 몸처럼 될 것이다 (빌 3:21) 성경에서는 이것을 몸의 구속, 아들의 명분을 이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거듭남으로 시작해서 변화를 거쳐 몸의 변형으로 완성된다.

— 진리의 변호와 확증 155

보상

報償 reward

왕국은 보답 (recompense) 이 아니라 보상 (reward) 이다. 베드로는 그가 모든 얽매인 것과 실패를 버림으로 보답으로서가 아니라 보상으로 왕국을 얻을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마 19:28-30, 20:1-16 참조) 이것은 주님께서 더 많이 지불하면 더 많이 받는다는 상업적인 원칙에 따라 행하시지 않음을 의미한다. 왕국의 나타남 안에 있는 영생의 완전한 누림은 값으로 계산할 수 없다. 우리가 지불하는 대가는 우리가 받을 보상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보상을 받는 것은 상업상의 거래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액수를 지불하고 그 값과 동등한 어떤 것을 받는 문제가 아니다.

—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580

보양하심

nurish

사람들을 보양하는 것은 세 단계 (성육신의 단계, 포함의 단계, 강화의 단계) 에서의 충만한 사역 안에 계시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로 그들을 먹이는 것임.

— 활력그룹 메시지 11
‘소중히품으심’ 참조

보증

保證 pledge

에베소서 1장 14절에서 그 영은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신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맛봄을 보장하는 우리의 신성한 유업의 보증, 미리 맛봄이다. “보증”이라는 단어는 확실한 전조가 되는 것, 담보, 보장 및 미리 맛봄을 의미한다. 고대의 관습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한 구획의 땅을 샀을 때, 판매자는 그에게 보증을 위한 견본으로서 그에게 한 조각의 땅을 주곤 했다. 그 흙은 구매자가 동일한 토양의 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보장이었다. 이것은 인치시는 영이 우리를 인치신 후에도 우리가 우리의 기업이신 하나님을 미리 맛보도록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의 한 가지 예이다

— 신약의 결론, 하나님 359

히브리서 7장 22절에서 “보증” 으로 번역된 단어의 헬라어 어원은 수족 (手足), 즉 몸의 한 지체를 뜻한다. 여기서의 의미는 몸의 한 지체가 자기를 몸에게 보장하는 것이다. 이 보장은 담보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새 언약과 우리 모두에게 보장하심은 그분이 새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겠다는 보장, 보증인이다.

—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357

보혜사

保惠師 paraclete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보혜사이시다 (요일 2:1). 그분은 우리의 보혜사가 되기 위한 의로우신 분이시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있는 “대언자”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파라클레토스 (parakletos) 이며, 그것은 또 다른 면에서 사람을 돕기 위해 부르심 받은 분, 즉 돕는 자이시고 법적인 도움을 주거나 다른 사람을 대신해 중보하는 분, 즉 대언자, 모사, 중보자를 가리킨다. 그 단어는 또한 위로하는 것과 위로를 가리키며, 그러므로 위로자, 위안자를 가리킨다. 보혜사 (paraclete) 는 파라클레토스 (parakletos) 의 영어화된 형태이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의 사건과 일을 돌보시는 실제의 영에 대해 사용된다 (14:16,26, 15:26, 16:7). 그는 아버지께 대언하시는 분, 우리의 사정을 돌보시는 분, 우리를 대신하여 중보하시는 분 (롬 8:24), 우리가 죄를 범하면 우리를 위해 탄원하시는 분이신 주 예수님에 대해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사용된다. 이러한 중보와 탄원은 그분의 속죄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의 보혜사, 대언자이신 그리스도는 사실상 우리의 영적인 변호사이다. 다비 (J.N.Darby) 는 요한일서 2장 1절의 각주에서 우리의 대언자이신 그리스도가 모든 면에서 소송 의뢰인의 이익을 지켜주는 로마의 변호인과 같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마다 아버지는 우리를 상대로 소송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돌볼 하늘에 속한 변호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우리의 대언자, 보혜사로 필요로 한다

—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145

본本

베드로 전서 2장 21절에는 “그리스도 또한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 여러분이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주셨습니다” 라고 말한다. “본”이라는 단어는 통속적으로 사용됨으로 말미암아 오염되어 왔다. 그 헬라어 단어는 축어적으로 학생들이 글씨를 배울 때 밑에 놓고 베끼는 필기본을 의미한다. 고대의 교사들은 종이 위에 글씨를 쓰곤 했는데, 그 글씨들은 원본이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종이가 그 원본 위에 놓여졌다. 그런 다음 어린이들은 원본의 글씨를 자신들의 종이 위에 베낌으로써 글씨 쓰기를 연습했다. “본”이라는 헬라어는 쓰기를 가르치는 데 사용된 그런 원본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가 베낌으로써 복사하고 그 자취를 따를 수 있도록 그분의 고난의 생활을 우리 앞에 원본으로 두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모방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방이 아닌 재생산이다. 모방과 재생산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외적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이시다. 내적으로 그분은 우리 안에 사시고, 형상을 이루시고, 우리 안에 그분의 거처를 만드시는 우리의 인격이시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원본의 재생산,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의 재생산이 된다. 우리는 신성한 생명의 풍성을 포함하는 과정을 체험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재생산, 그리스도의 복사본들이 될 필요가 있다.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을 표현하는 생활 방식은 그리스도의 재생산이다. 믿는 이들의 본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을 재생산하기 위하여 사용되신 원본이시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복사본들이 되기 위해 영적인 재생산의 과정 중에 있다.

—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434

본성

本性 nature

본성, 성정, 성품, 천성, 자연, 성질, 자질, 특성, 특질, 종별, 자연대로의 상태, 원시상태, 진실미, 체력, 樹液, 樹脂

본디부터 가진 성질 (real nature) 로서 사물이나 현상에 있어 원래부터 지닌 고유한 특성을 의미한다. 삼일성에 있어서는 아버지 하나님에 한정해서 쓰인다. 사람에 대해서는 ‘性情’ 으로도 많이 쓰인다. 중국어에서는 성질로 쓰이나 disposition 의 성질과 구분하기 위해, 주로 ‘본성’ 으로 사용한다.

본질

本質 essence

헬라어 단어인 ‘우시아’ (ousia) 는 실체의 본질을 말한다. 나무로 만든 탁자에는 그것의 본체인 나무가 있고 이 본체 속에는 본질이 있다. 본질에 대한 라틴어 단어는 ‘에센티아’ (essentia) 이다. 삼일 하나님은 하나의 ‘우시아’ 안에서의 세 ‘히포스타시스’이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 안에서 셋의 위격을 지니신 분이다. 위격은 혼동되어서는 안되고, 본질은 나뉘어서는 안 된다.

— 그 영 19

본질이라는 말은 요소 (element) 와 본성 (nature) 이라는 두 단어와 비교해 봄으로 알 수 있다. 요소는 실체 (substance) 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세가지 요소 곧 금과 진주와 보석들이 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의 건축에는 세가지 실체 혹은 요소가 있다. 모든 요소는 그 본성 (nature) 을 가지며, 요소의 본성 안에는 본질 (essence) 이 있다. 따라서 본질은 바로 그것 자체를 뜻한다. 이제 우리는 본질과 실체 이 두 단어를 사용할 때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우리는 본질의 실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실체의 본질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각각의 실체나 실질적인 요소마다 그 본질을 소유한다. 하나님이 영원한 하나님 이시라는 것은 성경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다. 영원한 하나님은 그분의 존재 (existance) 를 갖고 계시며 그분의 존재와 함께 거기에는 본질이 있어야 한다. 본질이 없이는 존재가 없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본질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본질은 주로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킨다. 우리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존재는 그분이 우리가 신성한 본질이라고 부르는 본질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 장로훈련Ⅲ

본질은 바로 실체의 내재적인 문제이다. 예를 들어 나무 한 토막은 실체이지만, 이 실체 안에는 본질이 있다. 그 본질은 이 실체를 결코 떠날 수 없다. 주님은 실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님 속에 그분의 본질이 있고 이 본질은 본질적인 영이다.

— 그 영 13

요한 복음 4장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할 때 이것은 탁자가 나무라도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탁자가 ‘그 나무’라고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탁자는 나무라고 할 때, 이것은 탁자의 본질이 나무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본질은 영이다.

— 그 영 9

본질, 정수, 근본적 성질, 본질 구성의 요소,

본래의 성질, 근본 성질, 본바탕 (intrinsic nature), 사물의 현상 뒤에 있는 실재

삼일 하나님에 있어서 영 하나님에 한정해서 쓰임

본질적인 삼일성

본질적인 삼일성은 삼일 하나님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분의 존재를 위한 것임. 그분의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은 한 분이며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사 45:18, 고전 8:6). 본질적인 삼일성에 있어서 아버지, 아들, 그 영이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방식으로 동시에 함께 존재하며 상호 내재하며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또한 셋 사이에는 첫째, 둘째, 셋째의 구분이 없다.

— 오늘날 주의 회복의 주요 항목들의 중점

cf. 본질과 요소의 구분

그 영은 몸의 본질이며 그리스도는 몸의 요소이시다. 본질과 요소에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나무는 일종의 실제이다. 이 실체는 사실상 하나의 요소이다. 나무로 된 받침대에는 그것의 실체인 나무가 있다. 나무는 스탠드의 요소이다. 그러나 이 요소 안에는 본질이 있다. 이 본질은 그 나무의 「영 (spirit)」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요소요 실체요 영역이시다. 이 그리스도 안에 몸의 본질인 그 영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수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온전한 수박은 수박의 실체이다. 수박을 조각조각 자를 때 우리는 수박의 요소를 볼 수 있다. 이 조각이 눌러 짜질 때 우리는 그 수박의 본질인 수박 즙을 얻는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요소이시고 영은 본질이시다. 영이 없이 그리스도만 있는 것은 즙 없는 수박을 갖는 것과 같다. 우리는 즙을 가진 수박이 필요하다. 주스를 가질 때 우리는 수박의 본질을 갖는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몸의 요소이시고, 그 영은 그분의 몸의 본질이다.

— 하나님의 경륜과 분배하심 128

본체

本體 hypostasis

삼일성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또 다른 단어는 본체이다. 이 영어화된 헬라어 단어는 사실상 두 단어 - 아래에 혹은 밑에라는 의미의 ‘hupo ' 와 실질적인 지탱을 의미하는 ‘stasis'- 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밑에서의 실질적인 지탱을 의미한다. 이것은 밑에서 실질적으로 지탱해주는 탁자의 네 다리와 같다. 영어에서 본체 (hypostasis) 는 바로 실질적인 지탱을 의미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신성한 삼일성 혹은 신격의 세 본체 또는 실체이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이 단어는 인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이해는 동떨어진 것이며 어려움을 일으킨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세 본체라고 하는 것은 옳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세 인격이라고 명백하게 말하는 것은 너무 멀리 나아간 것이다. 그리피스 토마스는 우리 삶의 언어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삼일성을 정의하기 위해 인격과 같은 단어를 빌어 올 수는 있지만, 만일 우리가 그 용어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삼신론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본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조차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을 정의하기 위해 어떤 용어나 어휘나 실례를 사용할 때 우리는 항상 모험을 하기 때문이다. 신성한 삼일성은 너무나 비밀하고 우리의 제한된 이해로는 그러한 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

— 장로훈련

본질 (hypostases) 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두 단어 곧 아래 (under) 를 의미하는 전치사 휘포 (hupo) 와 지지 혹은 떠받침을 의미하는 스타시스 (stasis) 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아래에서 떠받치는 것, 밑받침, 즉 밑에서 지지하는 무언가를 가리킨다. 이 말은 상부구조가 그 위에 놓아지는 기초공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기초와 입장을 의미한다. 우리가 합당한 기초 공사나 받침대를 가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몇몇 사전에서는 본질이라는 말을 삼일성의 삼위와 연결시킨다. 본질이라는 말은 인격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이 말을 신격의 삼위, 즉 아버지, 아들, 그 영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해 왔다.. 사실상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세 본질들 (hypostases), 즉 지지하는 신격의 본체들이다. 달리 말하면 신격은 아버지, 아들, 그 영의 지지하는 본체들로 구성된다. 이것은 만일 세 본질들이 없어진다면 신격은 그의 본체를 상실할 것임을 의미한다.

— 신약의 결론, 하나님 446

분배하심

分配하심 dispensing

dispensation 은 분배하심 (dispensing) 이란 용어는 차이가 있다. dispensation 은 부요한 공급이신 그분 자신을 그분의 택하신 모든 백성들에게 분배하기 위한 그분의 계획이다. 하나니믜 경륜 안에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그분의 백성들 안으로 분배하시고자 하신다. 분배하심은 나누어 주는 것이며 배급하는 것이며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누림을 위해 그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나누어 주시고 배급하시며 분배하고 계신다.

—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신성한 삼일성과 삶 37

스코필드 박사는 참고 성경에서 일곱 가지 dispensation - 무죄, 양심, 인간 통치, 언약, 율법, 은혜, 왕국 - 이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곱 가지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이들 일곱 가지 계획은 시대를 달리하여 일곱 가지의 상이한 방법으로 사람을 다루심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해는 바르다. 그러나 여기에 진전된 더 깊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dispensation 은 그분의 신성한 계획으로서 그분의 모든 신성한 풍성과 함께 그분 자신을 그분이 택하고 구속하신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는 것이다.

—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신성한 삼일성과 삶 24

분배한다는 말은 배급한다는 의미이다. 가령 우리가 커다란 주스 용기를 가졌다고 하자. 사람들로 주스를 마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스를 용기로부터 그들 안으로 분배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주스를 컵들 안에 부어서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 주스는 용기 안에 있어 왔지만, 지금은 그것이 분배 받은 사람들 속에 있다. 우리가 삼일 하나님의 분배를 말함에 있어서 의미하는 바는 마치 주스가 그 용기로부터 그것을 마시는 사람들에게 분배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배급한 다음 그분 자신을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의 분배 안에서 사실상 하나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고 우리 그릇을 채우시며 우리와 하나되신다. 이것이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삼일 하나님의 분배이다.

— 로마서 L-S 673

불쌍히 여기심 (연민)

불쌍히 여기심은 긍휼과 가깝지만, 긍휼보다 더 깊고 더 섬세하고 더 풍성하다. 긍휼은 다소 밖의 것이지만, 불쌍히 여김은 내적인 것이다. 더욱이 불상이 여기심은 긍휼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 긍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엘레오스 (eleos)' 는 가련한 자의 비참한 상태에 의해 유발된 반응을 언급하는 것이다. 긍휼은 비참함에 대해 반응하는 행동이나 나타남을 보다 더 의미한다. 로마서 9장 15절과 고린도후서 1장 3절에 있는 불쌍히 여기심 (연민, 동정) 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오이크티르모스 (oiktirmos)' 이다. 이 단어의 어근은 사람 속에 있는 부드러운 애정의 중심지라고 믿어졌던 사람의 속 부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기심에 해당하는 단어는 애정을 느끼는 자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감정을 뜻한다. 이 감정은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아주 깊은 애정이 어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기심은 비참함을 쳐다보는 사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내적인 느낌을 의미한다. 이것은 가련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내적인 애정을 보여주는 단어들 가운데 가장 깊은 것이다.

— 신약의 결론, 하나님 127

비결

秘訣 secret

비결이란 어떤 일의 기교를 가리키는 것이다. 어떤 일이나 어떤 물건을 만드는데 있어서 당신의 기교가 바로 당신의 비결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그는 “나는 비천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고 풍부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각각의 일과 모든 일에 있어서 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 가지 비결로 각양의 상황에 대처했다. 비천이든 풍부든, 배부름이든 배고픔이든 각종 일과 심지어 모든 일에서 바울은 그 비결, 곧 기술, 기교를 배워서 어떻게 그 상황에 대처할 지를 알았다.

—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하는 그 영 메시지 1

사망

死亡

사망에 대한 정의는 약함이다. 우리가 극도로 약할 때, 그것이 사망이다. 사망은 약함이다. 많은 때 우리는 선을 행하려고 한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가 선을 행하려고 할 때, 우리는 실패한다. 우리는 인내의 공과를 배울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는 인내하지 못하도록 준비된 것이다. 바울은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8) 고 말했다. 이것이 약함이며, 약함은 사망이다.

심지어 영적인 일들에서도 우리는 사망을 발견한다. 우리는 몸의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해야 함을 알고 있다. 교회 집회에 오기 전에, 우리는 기능을 발휘하기로 결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원함은 있으나 행하는 것이 없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집회에 올 때 약하게 하는 것을 느낀다. 그러한 약하게 함이 사망이다. 사망은 역사하고 있다. 사망은 매일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실로, 모든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을 것이다.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사망은 우리의 육체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일 분 동안 화를 낸다면, 이것은 우리로 삼 일 동안 죽게 할지도 모른다.

— 육체와 영 21

삼위 양식론

modalism

삼위 양식론이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영원하지도 않고 동시에 함께 존재하지도 않으며 단지 한 분 하나님의 세 방면의 일시적인 나타남에 불과한데, 아들이 오면 아버지는 끝나며 그 영이 오면 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삼위 양식론은 하나님이 하나인 면을 강조하고 신격의 셋이 동시에 존재함과 상호 내재함을 부인하는 이단의 극단에 이른다. 반면에 삼신론 (tritheism) 은 하나님이 셋이라는 면을 강조하여 극단적인 이단에 빠진다.

— 오늘날 주의 회복의 주요 항목들의 중점

new

성경에는 우리에게 두 가지 창조 - 새 창조와 옛 창조 - 를 계시한다. 옛 창조 안에 있는 어떤 항목도 하나님의 성품을 포함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옛 창조 안에는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새 창조 안에 있는 모든 것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이 있다. 옛 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에 속한 것이 없으나 새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구성되어 있다. 신약 안에 있는 어떤 「새 -」것도 물질이나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의 새 마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겔 36:26).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뜻이다 (엡 4:23). 신약에서 「새 -」라고 명명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 항목들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을 가리키거나 암시한다. 만일 당신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당신에게는 새 마음이 없다. 새 부대와 새 술과 새 옷과 새 언약 등 모든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새 -」라고 명명된다. 옛 언약은 죽은 문자에 속한 것이나 새 언약 안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새 언약은 전체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것은 생명에 속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신약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되어 있고, 신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전달한다. 하나님은 새로움이시고 새로움은 하나님이시다. 「옛 것」은 옛 창조이며 옛 나이고 옛 당신이다. 그러나 당신 안에 하나님이 계실 때 새로움이 있다. 당신은 새로워지고 새로움이 된다. 새 마음과 새 생각과 새 사람과 새 창조 등 신약 안에 있는 모든 「새」항목은 그 안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셨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다.

— 신약의 결론 새 예루살렘 227

새 예루살렘

New Jerusalem

요한계시록 21장 2절 (또 내가 보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각주중에서 ;

“새 예루살렘은 역대로 구속받고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된 성도들 전체의 구성체를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은 생명이 없는 물질적인 성이 아니라 신부이며, 단체적이며 살아 있는 인격이다. 놀라우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신부의 남편이 되신다 (계 21:2).

새 예루살렘은 역대로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모든 성도들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구성체이다.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배필인 신부이고 (요 3:29), 하나님의 처소, 곧 그분의 장막인 거룩한 성이다 (계 21:3). 이것은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이며 (히 12:22),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리워했던 것이다 (히 11:10, 16). 이것은 또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고 우리의 어머니이다 (갈 4:26). 하와가 남편인 아담에게서 나와 그의 배필이 된 것같이 (창 2:21-24), 그리스도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은 남편인 그리스도에게서 나와 그의 배필이 된다.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본성의 풍성에 참여함으로써 준비된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인 새 예루살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되어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으로 온전히 적셔져서 그분의 처소가 된다.

새 예루살렘은 신부이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물질적인 성이 아니라, 단체적인 인격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그분을 만족하시게 하는 신부이고, 하나님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그분께서 안식하실 수 있으시고 그분 자신을 표현하실 수 있으신 장막이다.”

섞임

Blending

다른 종류의 것들을 섞어서 희망하는 품질의 것을 만들어내다. 특히 각 종류의 개성이 상실된다는 의미가 있다.

— 문자적 의미

고린도전서 12장 24절의 ‘고르게 섞으시어’ 는 blend 로서 섞이다, 혼합되다, 복합되다, 조정되다 의 의미이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한 몸 안으로 섞어 놓으셨다. 이는 우리가 실제적인 몸의 생활을 위해 같은 영으로 말미암아 천연적인 생명에서 영적인 생명으로 더 많이 변화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 고린도전서 L-S 561

하나님께서는 몸을 고르게 섞으셨다 (고전 12:24) 「섞다」라는 단어는 조정하다, 조화를 이루다, 조절하다. 연합하다를 뜻한다. 「섞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구별을 잃어버리는 것을 함축한다. 몸의 생활 안에서 조화되고, 섞이고, 조정되고, 연합되고, 조절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를 통하고 그 영에 의해 존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개별적인 지체들의 섞임과 어떤 특정한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의 섞임과 모든 동역자들의 섞임과 모든 장로들의 섞임을 가져야 한다. 섞임이란 우리가 항상 다른 이들과의 교통을 그쳐서는 안 됨을 의미한다. 그러한 섞임은 사교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개별적인 지체들과 지역에 있는 교회들과 동역자들과 장로들이 누리고, 체험하고, 참여한 바로 그 그리스도의 섞임이다. 그것은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한 것이며, 이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선한 기쁘심에 따른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 목표이다.

— 신성하고도 비밀한 영역

성화

聖化 sanctification

로마서에서 사용된 하기오스 (hagios), 하기오수네 (hagiosune), 하기아조 (hagiazo), 하기아스모스 (hagiasmos) 라는 헬라어 단어는 동일한 어근을 갖는다. 그 의미는 ‘분별되었다’는 것이다. 하기오수네 (hagiosune) 는 1장 4절에서 성결의 의미로 번역되었고, 하기아조 (hagiazo) 는 분사로 사용된 동사로서 15장 16절에서 성화 (聖化) 의 의미로 번역되었다. 하기아스모스 (hagiasmos) 는 6장 19절과 22절에서 거룩하게 하심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분별되었음을 의미한다. 성도란 (하나님께) 분별된 사람들을 의미한다. 성결은 거룩의 본질이요 본성이다. 성화는 산출된 실제적인 결과이고, (하나님께) 거룩하게 된 성격이자 행동이며, 최종상태이다.

— 로마서 L-S 233

성화는 금을 성전 안에 둠으로써 거룩해 지는 것과 제물을 제단 위에 놓음으로써 거룩해지는 위치의 변화 (마태복음 23장 참조) 와 차 한 봉지를 한 컵의 물 속에 넣을 때 물을 ‘차화’ (茶化) 시키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성화되는 방면이 있다.

— 로마서 L-S 601

거룩함 (holiness) 는 본질 자체를 의미하지만, 성화 (sanctification) 는 거룩하게 되는 과정, 즉 거룩케 하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데살로니가 전서 4:3 참조

니 형제님 당시에 기독교는 “성결” (聖潔) 이라는 말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니 형제님은 진보하여 “성별” (聖別)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그가 원문에서 이 단어의 뜻에 분별이라는 의미가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우리는 진일보 해서 “성화” (聖化) 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왜냐하면 이 거룩케 함이 다만 분별할 뿐만 아니라 더욱 변화시킨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 성경 안에서 우리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이상 34

소중히 품음

cherish

소중히 품는 것은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거지라면, 누군가 당신에게 바나나와 빵을 준다면 아주 기쁠 것이다. 우리의 몸이 아플 때 의사가 온다면 아주 편안하고 기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소중히 품는 것이다.

— 활력그룹 메시지 9

사람들을 소중히 품은 것은 그들을 즐겁게 하고 유쾌하게 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고, 사람들을 보양하는 것은 세 단계에서의 충만한 사역 안에 계시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로 그들을 먹이는 것이다.

활력그룹의 지체들은 그들이 소중히 품고 있는 사람들을 존속시키도록 반드시 사람들을 보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들을 보양하는 것이 없다면 우리가 소중히 품고 있는 것이 다 헛된 것이다. 어머니가 개구쟁이 자녀를 돌볼 때 먼저 그 어머니는 아이를 기쁘게 한다. 아이를 소중히 품는 것이다. 그러나 보양하는 것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이가 소중히 품어져서 즐겁게 된 후에 어머니는 음식을 가지고 먹인다. 주님은 한 면으로 그분의 인성 안에서 교회들을 소중히 품으시고 신성 안에서 그분의 신성을 가지고 교회들을 보양하신다.

— 활력그룹 메시지 11

소중히 품어 주심은 우리를 위로하고 달래고 부드러운 사랑으로 길들이고 부드러운 보살핌으로 기르심임

— 하나님 - 사람의 생활 메시지 2

속성

屬性 attributes

신성한 속성들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것에 관계된다. 하나님에 관하여는 ‘속성들’을 사용하지만, 사람에 관하여는 미덕들 (virtues) 을 사용한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본질을 지닌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셨으므로 하나님의 속성들을 지닌 하나님의 본성을 소유하신다. 그분은 사람의 본질을 지닌 처녀에게서 나셨으므로 인간적인 미덕들을 소유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이 땅 위에 계신 동안 그분은 사람에 속하고 또 하나님께 속하는 생명을 사셨다. 그분은 사람의 생명을 사시는 사람이셨지만 그 사람의 생명 안에서 하나님의 속성들이 표현되었다.

— 누가복음 L-S 17

하나님의 형상은 네 단어 - 사랑, 빛, 의로움, 거룩함 - 로 묘사된다. 이것들이 하나님의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속성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빛, 의로움, 거룩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양에 관한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참 존재에 관한 묘사이다. 사랑이 그분 자신이요, 빛이 그분 자신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어떠함은 행위에 있어서 의로우시며 본성에 있어서 거룩하시다. 이러한 묘사가 하나님의 속성들이다.

— 누가복음 L-S 473

신성한 속성들은 인간적인 미덕들을 위해 있다. 이것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장갑의 예를 사용하면 도움이 된다. 장갑이 손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그 장갑은 비어 있을 것이다. 손은 장갑의 실제요 내용이다. 장갑으로 하여금 내용을 소유하게 하는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손이다. 장갑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의 내용과 실제로 하나님을 담을 수 있도록 디자인 된 하나의 ‘장갑’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적인 미덕들의 내용과 실제가 되는 신성한 본질로 잉태되신 분인 그리스도는 공허한 인간적인 미덕들을 채우신다. 또한 인간적인 미덕들을 강화시키고 부요하게 할 뿐 아니라, 인간적인 미덕들을 거룩하게 한다. 결국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표현하게 된다.

— 누가복음 L-S 486

속죄

贖罪 propitiation

속죄 (propitiation) 란 용어는 구속 (redemption) 과 보상 (atonement) 이라는 용어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구속은 십자가 위에서 주 예수님의 죽음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므로 이 용어는 단지 신약에서만 쓰여져야 한다. 그 분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기 전에는 그런 구속과 같은 것이 없었다. 구약에 있는 것은 속죄이다. 때때로 속죄라는 히브리어는 보상으로 번역된다. 보상 (atonement) 은 하나됨의 문제이다 (at-one- ment) 즉, 그것은 두 무리를 화해시키고 하나로 만들기 위해 그들 사이에 있는 상황을 진정시키는 것을 말한다. 속죄는 한 무리가 다른 무리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어떤 일을 행함으로 두 무리 사이의 상황을 진정시키는 것을 말한다. 레위기 9장 7절에서 아론은 그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 속죄하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하나님과 문제가 있었으므로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상황을 진정시키는 어떤 것을 해야만 했다. 구약의 희생 제물들은 속죄의 절기에 법궤의 덮개 위에 뿌려졌다.

— 레위기 L-S 312

속죄소 (시은좌)

贖罪所

승천 안에서의 그리스도는 속죄소 (시은좌) 이다. 로마서 3장 25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속죄소로” 세우셨다고 말한다. 여기의 속죄에 대당하는 단어는 힐라스테리언 (hilasterion) 으로서 힐라스모스 (hilasmos) 와 힐라스코마이 (hilaskomai) 와 다르다. 히브리서 9장 5절에서 이 단어는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의 덮개, 뚜껑에 사용된다. (흠정역에서는 “시은좌” 로 번역됨). 출애굽기 25장 16절부터 22절까지와 레위기 16장 12절부터 16절까지의 칠십인 역 성경 (The Septuagint) 도 이 단어를 언약궤의 덮개에 사용된다. 언약궤 안에 있는 십계명의 율법은 하나님을 접촉하러 온 사람들의 죄를 그 법의 의로운 요구들에 따라 드러내며 정죄했다. 죄인의 편에서 모든 상황을 속죄하는 날에 언약궤 위에 뿌려진 속죄하는 피가 뚜껑까지 완전히 뿌려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행정적으로 그분의 의에 대해 아무런 모순도 없이 언약궤의 뚜껑을 보호하는 그분의 영광을 지닌 그룹의 보호 아래서 그분의 의의 법을 어긴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뚜껑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예표했던 화해하는, 속죄하는 제물은 하나님의 의와 영광의 모든 요구들을 만족시켰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 당시에 일어났던 사람들의 죄들을 간과하실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그분의 의로움을 보여 주기 위해서도 이렇게 하셔야만 했다. 이것이 로마서 3장 25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승천 안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실 수 있는 장소, 즉 속죄소라는 점이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는 이 장소를 은혜의 보좌라고 부른다. 은혜의 보좌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뿌려진 언약궤의 덮개이다. 그분의 속죄하는 피가 뿌려져 있기 때문에 언약궤의 덮개는 하나님이 우리를 접촉하고 우리가 그분의 은혜를 충만히 누릴 수 있는 곳, 속죄소가 되었다.

—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147

신격

神格 Godhead

믿는이들이 결코 영원히 참여할 수 없는 것. 초기에 어떤 교부들은 믿는이들의 신격화 (deification) 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들은 믿는이들이 신격 (Godhead) 에 도달한다거나 하나님으로서 경배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갖고 있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거듭난 사람들인 우리는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으나 신격의 위치에서는 하나님과 같지 않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사실 회복 안에서는 신격화 (deification) 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믿는이들이 신격에 도달한다고 주장하는 의미에서 신격화를 가르치는 것은 이단이다. 절대로 우리는 신격에 참여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으로 경배 받는 위치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거듭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갖는다

— 베드로 후서 L-S 28

창조는 하나님의 인격을 보여 주거나 전람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전람되고 표현되었다. 골로새서 2장 9절은 신성의 충만이 아닌 신격의 모든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신격, 즉 인격을 가리킨다. 창조물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격을 나타낼 수 없고 단지 하나님의 특성만을 보여 줄 수 있다. 오직 사람만이 인격을 전람하거나 나타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격을 전람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골로새서 2장 9절의 「신격」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인격을 가리킨다. 창조는 하나님의 인격은 보여주지 못하고 단지 하나님의 특성만을 보여 줄 뿐이다.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는 신격, 즉 하나님의 인격을 보여 주시며 몸으로 하나님을 충만히 보여 준다. 믿는이들인 우리는 신성한 본성의 신성한 특성들을 가지며 심지어 신성한 본성 자체도 가져야 하지만 신격은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신격 안에는 신성한 본성이 포함되어 있다. 골로새서 2장 9절에 있는 신격은 신성한 본성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신성한 본성이 하나님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신약의 결론 새 예루살렘, 262

신성

神性 divinity

하나님의 본성의 특징들

— 그리스도의 기묘한 어떠하심과 하나님의 생명의 구원 13

로마서 1장 20절에서 다비 (J.N.Darby) 는 신성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하나님의 특성」을 뜻한다고 말했다. 로마서 1장 20절의 「신성」이라는 헬라어 단어 쎄이오테스 (theiotes) 는 신성한 본성의 특성들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가구의 본성은 나무라고 할 수 있고, 나무의 구성 입자는 그 본성의 특성이다. 로마서 1장 20절에 의하면, 창조는 다만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의 특성과 표현만을 보여 준다. 창조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 자체는 볼 수 없다.

— 신약의 결론, 새예루살렘 261

신성하고 비밀한 것 (영역)

신성한 것은 하나님 면에 있고, 비밀한 것은 사람 면에 있다. 신성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통해 하는 것이다. 주님은 신성한 생명에 의해 그분의 인생을 사셨으므로 그분의 인생은 비밀했으며, 그분은 사람이셨지만, 신성하게 사셨으므로, 그분의 인생은 비밀했고 이해될 수 없었다.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은 신성하고 비밀했으니, 이는 그분이 육신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그분을 통해 사셨다. 이 땅에서의 주님의 생활의 모든 부분이 신성한 사실이었으며,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다 신성한 것이다. 첫 번째 하나님 -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삶에서 신성한 사실들이 인생 안에서 살아내어져 그분의 인생을 비밀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분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은 그분의 인생 안에서 비밀하게 성취된 신성한 사실이다. 기도의 사람으로서, 주님은 사람의 생명이 아닌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살았으므로 신성하고도 비밀한 영역 안에 있을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븐의 기도가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있었기 때문이며, 그분의 모든 기도는 그분의 신성하고 비밀한 인생 안에 있는 비밀한 사실들이었고, 그분의 기도들은 신성했지만, 그 기도들이 인생 가운데 있었으므로 그 인생을 비밀하게 만든 것이다.

— 그리스도 신성 결정연구 M 2

신성한 본성

神性한 本性

신성한 본성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다. 가구의 본성은 가구의 어떠함이다. 만일 가구가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면 가구의 본성은 나무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강하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영이심과 (요 4:24) 하나님이 사랑이심과 (요일 4:8,16) 하나님이 빛이심 (요일 1:5) 을 말한다.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관련된 이 모든 항목들은 사도 요한이 쓴 것들이다.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것은 영이며 사랑이며 빛이신 하나님께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영은 하나님의 인격의 본성을 가리키며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신성한 본질을 가진 신성한 분이다. 본질은 어떤 것의 요소보다 더 본질적이다. 요소 안에 있는 것이 본질이며 이 신성한 본질은 그 본성인 사랑을 거지고 있다. 더 나아가서 신성한 빛은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이다. 하나님은 본질과 표현을 가진 인격이시다. 신성한 본성은 하나님의 인격의 본성이며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이며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이다. 하나님은 신성한 분이며, 인격이며, 그분의 인격의 본성은 영이다.

이 인격은 또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분의 본질의 본성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구성된 분이다. 또한 빛은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이므로 영과 사랑과 빛은 신성한 본성의 구성 요소이다.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것은 신성한 영과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빛에 참여하는 것이다. 「신성한 본성」이라는 용어는 전체 성경 가운데 베드로 후서 1장 4절에서 한 번 언급되었을 뿐이다. 빛은 신성한 표현의 본성이며 의는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생활의 표현이며 하나님을 누리는 생활의 표현이다. 사랑은 그분의 본질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이며, 빛은 그분의 표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이며, 영은 그분의 인격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이며 거룩함은 어떤 상태 안에서의 하나님의 본성이며 이 상태는 분별이며 구별이다.

— 신약의 결론, 새 예루살렘 267

신성한 삼일성

神性한 三一性

삼일하나님은 주로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지만, 신성한 삼일성은 주로 신격의 주요 속성인 하나님의 삼이일 (三而一) 되심을 가리킨다. 신성한 분배하심은 삼일 하나님보다는 오히려 신성한 삼일성에 속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삼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격과 관련된 반면, 신성한 삼일성은 신격의 주요 속성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누구누구가 신실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신실함’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다. 신실한 사람은 그 사람을 가리키며, 그의 신실함 (faithfulness) 이란 그의 미덕인 신실함을 가리킨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고 계시지만, 특별하고 실제적이고 실행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삼일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서 우리 안에 계신다. 그렇지만 우리 안에 계시는 삼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지 용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이일이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다. 우리는 신격의 삼일성을 체험하고 있다. 아버지가 우리 안에 계시며, 아들이 우리 안에 계시고, 영이 우리 안에 계신다. 이들은 세 인격이 아니라 한 하나님의 삼일성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신성한 삼일성은 신격의 가장 강한 속성이다. 그분의 신실하심과 사랑과 온화하심 등의 속성은 이 속성만 못하다. 신성한 인격의 가장 뛰어난 속성은 그분의 삼일성이다. 그분의 삼일성은 오로지 그분의 인격으로만 조성되어 있으며, 그분의 인격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라는 삼일성 안에 있다. 이것이 고대 신학자들이 삼일성의 바로 그 본질을 묘사하기 위해 본체 (hypostasis) 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이다. 이 단어는 ‘아래’라는 뜻의 ‘hupo ' 와 밑에서부터 실질적으로 지탱해주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stasis' 라는 헬라어에서 온 것이다. 'hypostasis' 는 단수이고 hypostases' 는 복수이다. 이 영어화된 헬라어 단어는 밑에서부터 지탱해 주는 실질적인 본질을 의미하며,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삼일의 신격의 조성을 가리킨다. 신학에서 본체들 (hypostasis) 라는 단어는 점차적으로 인격들 (persons) 로 바뀌었다. 이것이 웹스터 사전에서 ‘hypostasis' 의 의미중 하나가 인격 (person) 으로 되어 있는 이유이다. 이것이 신학적인 정의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이 삼일 하나님의 조성임을 보아야 한다.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하심이란 그분의 조성이 우리 것이 되도록 삼일 하나님의 조성을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 장로훈련Ⅲ

신성한 삼일성이란 신성한 분배를 위한 것임

— 고후 13:13, 오늘날 주의 회복의 주요 항목들의 중점

신언

申言 prophesy

성경전체에서 신언이라는 말이 주로 예견을 뜻하지는 않는다. 구약과 신약에서 신언은 다음의 것을 뜻한다. 첫째, 위하여 말한다. 즉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하는 것. 둘째, 말해 내다. 즉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 셋째, 미리 말하다. 즉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말하고 예견하는 것.

신언은 미리 말하는 것으로 구성되었을 뿐 아니라 어떤 것을 말해 내고, 위해서 말하는 것이 더 많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가 예견적인 예언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책에 있는 대다수의 예언이나 말은 하나님을 대신한 선지자의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언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주로 “위하여 말하는 것”과 무엇을 “말해 내는 것”이다.

신언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감동아래 하나님을 위해 말하는 것이다. 마빈 빈센트 (Marvin Vincent) 는 그의 신약에 나타난 말씀 연구 (Vol. 3, P. 156) 에서 신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구약에서와 같이 신약에서의 예언은 예견이 아니라 경고와 권면과 교훈과 판단과 그 마음의 비밀을 나타낸 것을 영감으로 받아 전한 것이다. 고린도 전서 14장 3절, 24절, 25절을 보라. 신약의 선지자들은 직접적인 영감 아래 말하기 때문에 교사들과는 구별된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예언에 대한 주된 사상은 예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감 아래 하나님을 위해 말하는 것이다.

— 로마서 L-S 338

신진대사적인 변화

變化 transformation

변화되다 (transformed) 는 말은 바뀌다 (changed) 라는 말과는 다르다. 변화는 신진대사의 과정을 포함한다. 어떤 것이 신진 대사 없이도 바뀔 수 있다. 신진대사의 과정에서는 새로운 성분이 생명체에 공급된다. 이 새로운 성분이 옛 성분을 대치하고 옛 성분을 사라지게 한다. 그러므로 신진대사의 과정이 살아 있는 생명체 안에서 일어남에 따라 무언가 새로운 것이 생명체 안에서 창조되어 옛 성분을 대치하고 옛 성분을 사라지게 한다. 그러므로 신진대사는 다음의 세가지를 포함한다. 첫째, 새로운 성분의 공급이고, 둘째는 옛 성분을 새로운 성분으로 대치하는 것이며, 셋째는 새로운 어떤 것이 산출되도록 옛 성분을 버리고 제하는 것이다.

— 고린도 후서 L-S

변화는 주로 먹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 먹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진대사의 변화를 산출하기 위해 새 내용물이 우리 안으로 더해지고 옛 내용물이 배출되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의 얼굴이 매우 창백하다 하자. 그의 안색을 바꾸기 위해 화장을 하는 것과 합당한 영양 공급과 신진대사의 결과로 그의 안색이 바꾸어지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화장을 하는 것은 장의사의 일을 하는 것이다. 장의사는 죽은 사람의 얼굴에 화장을 하는데, 이는 죽은 사람에게는 생명 안에서의 어떤 신진대사의 변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고린도 전서 L-S

신탁

oracle

신탁이란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는 하나님을 위하여 말함이라는 뜻이 있고, 둘째로는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는 자들이라는 뜻이 있다. 모세와 바울이 현저한 자들로 그들은 하나님의 신탁이었다. 셋째로는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그 장소가 되는 그 지점을 가리키는데, 그 지점을 바로 신탁, 내소라고 하는 것이다. 고대에 언약궤의 덮개를 내소라고 불렀는데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장소였다. 그것을 시은좌 또는 은혜의 보좌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결함을 덮어 하나님께서 그곳의 중심에 오셔서 말씀하시는 근거가 된다는 그러한 장소이다. 신약에서 그분은 그리스도, 즉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에서 말씀하셨다. 시은좌라고도 하고 화해의 장소라고도 하는 그 장소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이다.

— 활력그룹 메시지 4

하나님의 맏아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수행하시도록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분배하심을 위한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이시므로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지체들인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인 우리도 하나님의 확산과 그리스도의 증가를 위해 하나님을 말하고 분배하는 하나님의 신탁이라는 것이다

— 활력그룹 메시지 3

실체

實體 substance

신성한 삼일성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서 먼저 본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그 다음에 실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실체 안에는 본질이 있다 신성한 삼일성에 대한 연구에서 다음의 중요한 진술이 있게 되었다 ‘삼일 하나님은 세 실체이시지만 단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다’.

이러한 진술은 보다 안전하다. 삼일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이시지만, 실체상으로는 셋이시다. 삼일 하나님은 그분의 본질에서 하나이시나, 그분의 실체에서는 셋이시다. 하나님이 세 본질을 갖고 계시다고 말하는 것은 틀리지만, 하나님이 세 실체를 갖고 계시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세 실체는 세 본체와 동등하며, 어떤 이들이 말하듯이 세 본체는 세 인격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실체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셋이지만, 본질로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이것이 본질적인 삼일성이다. 본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하나이시지만, 실체 (인격) 에서 그들은 셋이시다. 사실상 우리는 인격이라는 단어를 그리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본체 (hypostasis) 라는 단어를 인정한다.

— 장로훈련Ⅲ

아들의 명분

sonship

아들의 명분이란 생명과 성숙과 지위와 특권을 포함한다. 아버지의 아들이 되려면 아버지의 생명이 있어야 하고, 그 생명이 더 성숙되어야 한다. 생명과 성숙은 우리에게 아버지께 속한 것들을 물려 받을 수 있는 권리와 특권과 지위를 부여해 준다. 신약에 따르면 아들의 명분은 생명과 성숙과 지위와 권리를 포함한다.

— 갈라디아서 L-S 225

아들의 명분은 아들이 생명, 아들의 영역, 아들의 위치, 아들의 생활, 아들의 누림, 아들의 장자 상속권, 아들의 유업, 아들의 나타남을 포함한다

— 로마서 L-S 637

아들화하다

sonize

우리가 부르심 받았을 때부터, 거룩케 하는 영은 하나님의 ‘아들화’ 를 위해, 즉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위해 역사하기 시작했다. 이 거룩케 하심, 곧 아들화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약 이천년 동안 계속되어 왔으며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매일 안에서부터 거룩케되고 있다. 우리는 아들화 되고 있다. 거룩케함은 죄 없는 완전함이 아니며 또한 단지 위치적인 문제만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을 아들화 하기 위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아들화하다’ (sonize) 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하게 그분의 아들들로 만들기 위해 거룩케 하시는 역상의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우리가 고안해 낸 것이다. 우리는 부득불 그렇게 하였다.

— 우리의 영과 함께 하는 그 영 141

안식

安息

안식은 율법이나 종교 혹은 어떤 일이나 의무 아래에서의 수고나 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가리킬 뿐 아니라 온전한 평강과 충만한 만족을 가리킨다. 그분의 인격 안에서 그리스도는 믿는이들의 안식이시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주 예수님은 안식이신 그분 자신과 관련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하셨다. 이 구절에서 언급된 수고는 율법의 계명과 종교적인 규례를 지키려고 분투하는 수고뿐 아니라 어떤 일에 있어서 성공하려고 애쓰는 수고를 말한다. 그러므로 수고하는 사람마다 항상 무거운 짐을 진다. 주 예수님은 아버지를 찬양하고 아버지의 방법을 인정하고 신성한 경륜을 선포하신 후 (마 11:25-27) 그러한 수고하는 자들을 불러 그분께 와서 안식하게 하셨다. 또한 주님은 우리가 만일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에게서 배운다면 우리의 혼이 안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에게서 배움으로써 얻는 안식은 우리의 혼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안식이며 그 안식은 사실상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408

알파와 오메가

α와ω

우리는 시작과 처음과 알파가 같으며, 끝과 마지막과 오메가가 같고 그것들이 반복이라고 생각하여 이 용어들에 의해 혼돈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반복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측면들의 문제이다. 처음이라는 것은 그것이 반드시 시작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처음이라는 것은 단지 그것이 처음이며 그것 앞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작이라는 것은 그것이 처음일 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알파와 시작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 어떤 것은 시작이 있을 수 있지만 내용도 연속도 없을 수 있다. 그리스도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는 것은 그분이 완전한 내용과 연속이심을 의미한다. 헬라어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 문자인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리스도는 또한 알파벳의 모든 다른 문자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운행하심의 내용이요 연속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그분은 시작과 마침이실 뿐 아니라 알파와 오메가이시기 때문이다.

—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60

언약, 성약, 유명

言約 (covenant), 成約 (testament), 遺命

언약이란 약속은 되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합의를 가르킨다. 약속된 모든 항목들이 이루어졌을 때, 언약은 성약이 되는 것이다. 성약이라는 말의 현대적인 용어는 유명이다. 신약은 새로운 유명이다. 유명이라는 것은 유언자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유명은 유언자가 이미 어떤 일을 했거나 특별한 사람에게 어떤 것을 주었음을 말하는 성약인 것이다. 우리가 전한 복음은 처음에는 언약이었지만, 궁극에는 성약이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복음이 성약일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아브라함 안에서 모든 이방이 복을 받을 것이고 아브라함의 씨가 좋은 땅을 받으리라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에 불과했었다. 그 뒤에 창세기 15장에 와서 이 액속은 확증된 언약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든 약속된 것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새 언약은 새 유명이 된다. 모든 이방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새 언약은 새 유명이 된다. 모든 이방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복을 받았고, 아브라함의 씨가 이미 좋은 땅을 받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받은 것은 새 언약이 아니라 신약, 즉 새 유명이다. 이 유명은 곧 복음이다. 신약은 주 예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확증된 새 언약이다.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쳤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 제물 사이로 걸어가셨다. 이 새 언약은 아브라함과 확증하신 언약의 중복이나 연속으로 생각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단지 약속만이 아니라 언약이기도 하다.

— 갈라디아서 L-S 176

연결

連結 unite

두 종류의 나무가 연결 될 수는 있어도 연합 (mingling) 될 수는 없다. 나무는 가루가 되어야 비로소 연합될 수가 있다.

— 어떻게 장로와 동역자가 되는가 메시지 1

(참고) unite 의 명사형 union 은 만일 두 손을 깍지 끼듯 움켜진다면 내 두 손은 서로 union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합은 이보다 훨씬 더 한 것이다. 한 가지가 다른 가지에 접붙여졌을 때 그 결과가 곧 연합이다.

— 그리스도인의 생활 188

연합

聯合 mingle

특별히 원래의 요소들이 그 배합 안에서 구별될 수 있도록 (다른 한 가지에 한 가지나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을 함께) 결합하거나 배합하는 것.

— 웹스터 대사전

달리 말해서 두 가지 것들이 하나의 실체로 연합되지만, 그들 개개의 본성은 제 삼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고 여전히 동일한 본성으로 남아 있다. 앤드류 머레이는 동일한 것을 보았지만 레위기 2장 4,5절에 있는 소제의 예표에서 사용된 ‘연합되다’라는 단어 대신에 직물에서 처럼 ‘교직되다’ (interwoven)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 로마서에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결정 190

이 정의에 따르면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이 함께 연합될 때 그들의 원래 본성은 없어지지 않고 구별할 수 있는 상태로 남아 있다. 연합의 예로는 차 (茶) 를 들 수 있다. 차가 물에 연합되어 음료가 될 때 차의 본질도 잃지 않고 물의 본질도 잃지 않는다. 대신 두 본질은 남아 있다. 이 두 본질은 함께 연합되어 음료를 산출하지만 그것들은 차에 속하지도 물에 속하지도 않는 제 삼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는다. 주님은 신성한 본질로 잉태되셨고, 사람의 본질로 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제 삼의 어떤 존재를 산출하지 않고 함께 연합된 - 하나님과 사람 - 두 본질을 지닌 한 인격이시다. 주님께는 두 가지 본질이 있지만 그분은 여전히 하나의 온전한 인격,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이다.

— 누가복음 L-S 16

연합은 소제에 있어서 기름과 고운 가루의 섞임과 같다 (레 2). 고운 가루는 기름 안에 있고 기름은 고운 가루 안에 있다. 이것이 연합이다.

— 로마서 L-S 712

염치

廉恥 modesty

문자적으로는 수줍음, 즉 고상한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제한되고 붙잡아 매여진 것으로 (빈센트) 나서거나 지나치게 대담하지 않고, 절제하여 여자의 고유성을 지키는 것.

— 디모데 전서 2:9 참조

靈 spirit - 영어에서의 문자적 의미

영어에서 “영”이라는 단어의 특수한 사용법은 액체의 형태로 추출된 물질의 본질, 특히 증류에 의해 추출된 물질의 정수 (精粹) 의 뜻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특별한 물질의 추출물은 그 물질의 영이다. 예를 들어, 밀알들의 추출물로 만들어진 알콜 음료도 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사지낼 때, 주 예수님의 몸에 붓기 위하여 몰약과 함께 사용된 침향도 영의 일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식물이나 밀알, 혹은 다른 어떤 물질이 압착될 때, 우리는 그것에서부터 그 물질의 영을 추출해낼 수 있다. 우리는 이 원칙을 주님의 죽음에 적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추출된 것은 무엇인가 ?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추출된 것은 그리스도의 영의 요소라는 것이 그 해답이다. 모든 물질의 참된 본질, 혹은 성분은 그것의 영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차를 마실 때, 우리는 사실상 차의 추출물, 영을 마시는 것이다. 차의 효능은 이 추출물, 혹은 이 영 안에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능은 복합적인 그 영의 성분들 중의 하나이다.

— 출애굽기 L-S 메시지 159, 누가복음 L-S 514

영광

榮光

성경에서 영광은 나타나신 바 된 (표현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표현되실 적마다 그것은 영광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감취어 있고 숨겨져 계실 적마다 거기에는 영광이 표현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인 바 되실 때 거기에 영광이 있다. 그분의 영광을 보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인 반면에 보인 바 된 하나님은 영광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으로부터 좋은 땅으로 여행하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인 바 되었다 (출 13:21). 낮에는 하나님이 구름으로 보인 바 되었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인 바 되었는데 그것이 영광이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말씀이 하나님이셨다는 것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과 또 우리 모두가 그분의 영광을 바라 보았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요 1:1,14). 하나님의 나타나심 안에 영광이 있다. 하나님을 볼 때 우리는 영광을 본다.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스데반이 산헤드린 앞에서 간증하고 있을 때 말하기를,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여...」라고 했다. 여기서의 영광은 마치 구름과 불기둥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바 되고 성막과 성전을 가득 채웠을 때 처럼 (출 40:35, 왕상 8:11) 분에 보이는 영광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그를 부르신 분은 바로 그러한 영광의 하나님이셨다. 그분의 영광은 아브라함을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분별시키고 성별시켰으며 (출 29:43),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좇아갈 수 있게 한 큰 격려와 힘이었다. (창 12:11,4)

— 신약의 결론, 하나님, 46

영화롭게 됨

glorification

객관적인 영화롭게 됨은 바로 구속받은 믿는이들이 하나님의 영광 안으로 이끌려져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고 (히 2:10, 벧전 5:10), 주관적인 영화롭게 됨은 생명이 성숙된 성도가 그들 속에서부터 생명의 성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내어 그들의 생명의 성숙의 성분이 되는 것이다 (롬 8:17-18, 21, 고후 4:17). 영화롭게 됨은 우리의 몸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 요 3:6, 롬 12:2, 8:23,30

— 그리스도의 기묘한 어떠하심과 하나님의 생명의 구원 123

예수같은 사람

Jesusly human

예수같은 사람 (human like Jesus) 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종류의 표현은 잘못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원숭이에게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접미사 ly 는 그 본성과 태도와 혹은 겉모양에 있어서 같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결국 이러한 용어가 없기 때문에 회복안에서 이러한 용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 장로훈련Ⅲ

예표

豫表 type

구약에는 많은 예표들이 있다. 구약에는 많은 사람, 사건, 사물들이 예표로 사용되었지만 이것이 예표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명확한 증거를 찾아야만 한다. 신약에서 그 사물, 사건, 사람을 예표로서 언급한 곳이 없으면 성급하게 이것이 예표라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기껏해야 이러한 사람, 사건, 사물을 예증으로 빌려와서 신약에 있는 진리를 설명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것이 예표 (Type) 라고 할 때 이것은 단순히 예증 (illustration) 이라고 말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 70

옛사람 및 일곱 가지 항목의 구분

옛사람 - 아담 안에 있는 옛창조의 사람, 우리 존재로서 창조 되었으며 타락된 사람

— 객관적

나 - 옛사람이 자신을 부르는 명칭

혼 생명 - 옛사람의 생명

육신 - 옛사람의 살아 표현됨, 또는 옛사람의 생활 (주관적). 우리의 혼의 생명이 살아 표현되기 전에는 단순히 옛사람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살아 표현되면 육신이 된다.

기질 - 사람의 타고난 성향을 말하며, 특히 나쁜 기질을 말함

자아 - 인간적인 관념과 의견으로 표현된 혼의 생명

타고난 성분 - 우리의 타고난 능력과 소질과 재치

— 생명의 체험下 10장

온유

溫柔

온유하다는 것은 세상의 반대에 저항하지 않고 그것을 기꺼이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온유의 미덕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침해하지 않고 그들과 싸우지 않는다는 의미한다. 그대신 우리는 기꺼이 양보한다. 온유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는 것이지만, 천연적으로 강한 사람들은 싸우며 양보하기를 거절한다. 최소한 그들은 그들의 입장에 서기를 원한다. 그러나 온유는 싸우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고 양보한다. 온유란 신성한 생명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미덕이다. 그리스도의 온유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인성 안에 있으며 신성한 생명으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셨을 때 신성한 생명으로 말미암는 인생을 사셨다. 이러한 신성과 인성과의 연합을 통하여 온유의 미덕이 표현되었다.

—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506

온전한

complete

‘完備한’이라는 양적 측면을 강조한 단어이다. Having all its parts or element; lacking nothing ; whole, entire, full

반의어는 partial, unfinished, inadaquate 가 있다.

He is the complete God. This means that He is not merely God the Son but the triune God...

— 사람 안에서의 사람의 움직임 제 2장

He is the entire God, the whole God, not merely a part of God...

— 신약의 결론 2권

정통 신학자들과 근본적인 성경 교사들은 그리스도가 온전한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친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그리스도가 삼일성의 한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 신학자들과 교사들에게는 모순이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단지 삼일성의 한 부분이라고 말한다면 그분은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온전한 하나님의 단지 한 부분이다. 온전한 하나님은 아버지만이 아니며 영이나 아들만도 아니다. 온전한 하나님은 삼일 하나님이시다

— 누가복음 L-S 505

전체 단위의 모든 부분을 다 가지고 있는 것

— 야고보서 L-S 1:4 참조

온전함이란 조각 그림 끼워 맞추기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끼워 맞추기에서 온전하다는 것은 모든 조각들을 다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만일 한 조각이라도 없으면 이 끼워 맞추기는 온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온전하다는 것은 전체 단위의 모든 부분을 다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온전하다는 것은 어떤 단위의 모든 부분 또는 모든 조각이 다 있는 것이다.

— 야고보서 L-S 16

완결

完結

하나님 -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할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기 위해 이기는 자들이 된다.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기 위해서는 성숙되고 증가되는 것이 모두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건축에는 성숙, 즉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장의 분량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건축이 있어도 완결이 없을 수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들을 때 “우리는 새 예루살렘을 건축하고 있습니까 ? 아니면 완결하고 있습니까 ? 완결은 건축의 한 부분입니까 ?” 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것은 건축의 한 부분이지만, 여전히 구별되는 어떤 것이다. 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집회소 건축을 예로 들 수 있다. 집회소 건축이 완공된 후에도, 그것이 완결되기 위해서는 전기와 같은 어떤 것들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이기는 자들인 하나님 - 사람들도 새 예루살렘을 완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하나님 - 사람들 69

완결, 총결

consummation 總結

Complete(완성) 과 구별하기 위해, 그 영에 대해서는 주로 완결로,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주로 총결로 사용한다. 중국어에서는 ‘완결’이 소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 영이 완결이라고 할 때, 그 영은 또한 아들과 아버지를 포함한다. 마치 수학에서 25 더하기 15 더하기 30 이 70 인 것과 같다. 이 70 은 완결로서, 25 와 15 와 30 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완결된 영 안에는 아들도 포함되고 아버지도 포함되며 그 영도 포함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그 영안으로 완결되었다.

— 하나님의 경륜의 중점들과 하나님 - 사람들이 가져야 할 생활

완비

完備 entire

조각 그림 맞추기의 예를 사용하여 모든 조각들이 서로 끼워 맞춰질 때 거기에 완비된 실체, 즉 전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각 그림 끼워 맞추기에 백 개의 조각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모든 조각들이 손에 있을 때 이 끼워 맞추기는 온전하다. 또한 이 조각들이 합당한 위치에서 서로 끼워 맞춰질 때 완비된 전체가 된다.

— 야고보서 L-S 16

완전한

perpect

‘이상적인’이라는 질적인 주관적 가치 판단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完璧한의 의미가 있다.

There is no lack or defect, nor has any part been removed

“No blemish was found in Him, and He was proved to be perfect and qualified to be the Passover lamb for us.

— 마 26:2 각주

요소

要所 element

요소, 성분 (구성) 분자, (화학) 원소, 본령, 천성, 적소, 원리, 초보, 첫걸음

사물의 성립, 효력 등에 없어서는 안 되는 근본적인 조건, 더 간단하게 분석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에서 element 는 무엇을 이루기 위한 기본적이며 불가결의 요소를 의미하며 component 는 성분의 하나 constituent 는 구성 요소 전부 ingredient 는 반드시 불가결하지는 않은 요소를 말한다. 삼일성에서는 아들 하나님에 한정에서 쓰인다.

가령 어떤 음료수가 차, 우유, 설탕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자. 각각의 요소는 고유한 본질을 갖고 있다. 이것은 차에 차의 본질이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우유와 설탕에도 각각의 본질이 있다. 우리는 이 음료수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이 요소들 안에는 세 가지의 다른 본질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근원, 본질, 요소, 영역이 있는데 이 순서가 중요하다. 본질은 근원의 뒤에 나오며 요소는 본질의 뒤에 나오며 영역은 요소의 뒤에 나온다. 먼저 우리에게는 근원이 있다. 그런 다음 근원에서부터 본질이 나온다. 본질은 요소를 형성하고 결국 이 요소는 영역이 된다. 그러므로 생명에도 이러한 것이 있다. 물은 샘에서 흘러나와 강이 된다. 샘은 근원이다. 우리는 H2O 가 샘에서 나오는 것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본질은 물의 형태를 가지며 흘러나온 물은 강이 된다. 여기에는 근원인 샘이 있고 본질인 H2O 가 있고 요소인 물이 있고 영역인 강이 있다. 그러므로 강의 영역 안에는 요소인 물이 있고 이 요소의 본질은 H2O 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신성한 생명을 받았다. 하나님은 신성한 생명의 근원이며 샘이시다. 신성한 생명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떠하심, 곧 그분의 본질은 우리가 신성한 생명으로 영접한 영적인 물의 본질이다. 이 생명은 또한 우리가 그것에 의해 살 수 있고 그 안에 살 수 있는 요소이다. 우리가 신성한 생명의 요소 안에 살 때 신성한 생명은 우리의 영역이 된다. 지금 우리는 신성한 생명의 영역 안에 살고 있으며 신성한 생명의 요소를 소유하고 있으며 신성한 생명의 본질을 누리고 있다. 나아가서 신성한 생명의 본질을 누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유기적으로 하나가 된다. 이것이 우리가 신성한 생명과 함께 근원, 본질, 요소, 영역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 요한일서 L-S 262

우상숭배하는 일

idolatry

‘우상숭배’ (idol worship) 는 우상 앞에서 절하는 것과 경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만, ‘우상숭배하는 일’ (idolatry) 은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포함한다.

— 고린도 전서 L-S, 고전 10:7 참조

위엄

威嚴

위엄은 존귀에 있어서 지극히 큼을 나타낸다. 하나님에게 위엄의 속성이 있다는 사실은 그분이 고상한 품위를 지닌 지극히 크신 분임을 가리킨다. 또한 우리는 위엄이 영광과 존귀의 총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또한 위엄도 있으시다.

— 신약의 결론, 하나님 144

육체

肉體 flesh

사람이 타락했을 때에 그의 몸은 부패되었으며, 그리고 나서 그것은 변질되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육체의 욕심 (16절) 과 육체의 정 (情) 에 대해 말한다. 욕심과 정은 우리 타락한 몸에 속한 악한 것들이다. 육체는 부패되고 변질된 몸이다. 이것이 육체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의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몸을 창조하셨지만, 그분은 육체를 창조하시지는 않았다. 몸은 부패됨으로써 육체가 되었다.

— 봉사에 대한 기본 공과 266

육체는 우리 타락한 사람의 총체이고 옛사람의 살아나옴이다.

— 로마서 결정 연구 메시지 2

은혜

恩惠 grace

요한복음 1장 17절은 은혜가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왔으며, 요한복음 1장 16절은 “우리 모두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말한다. 고린도 전서 15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한다. 여기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을 비교해 볼 때 은혜는 바로 우리의 체험 안에서 우리의 누림을 위해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은혜는 단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사신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누림으로서 우리의 존재 안으로 분배되어 체험된 삼일 하나님 자신이다. 먼저 그분이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되고 그 다음에 우리의 속 부분들 안으로 확장될 때 그분은 우리의 누림이 되신다. 이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왔으며 (요 1:14,17),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요 (고후 13:13, 12:9), 심지어 그리스도 자신이다. (갈 6:18, 딤후 4:22 비교)

— 히 L-S 610

근원이신 아버지에 의해, 요소이신 아들에 의해, 적용이신 그 영에 의해 (고후 13:13) 믿는이들에게 분배되기 위한 그분의 성육신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

환난 중에도 당신 안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있어 당신으로 “할렐루야” 를 외치게 하는 것

— 사역재개 메시지

아버지, 아들, 그 영의 세 방면의 체현 안에서 삼일 하나님의 표현

— ‘97 신춘 중국어집회 중에서

하나님의 의는 정의와 의에 관하여, 그분의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어떠하심이다. 의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옳으시다. 그분의 정의와 의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어떠하심은 무엇이든지 그분의 의를 구성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내적인 본성에 관계 있는 반면에 의는 하나님의 외적인 행동, 방법, 행위, 활동과 관계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이 의롭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의의 기초위에 놓여 있다.

그 기초는 우리의 열심이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의 흔들릴 수 없는 기초인 하나님의 의이다 (시 89:14). 하나님은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심으로써 그분의 의를 내보이셨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그분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입증하셨다. 이제 그러한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견고한 기초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든지 않든지 자유로우시다.

은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의 의에 의해 매이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을 이루기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용서해야만 하는 법적인 의무가 있는 곳 안으로 그분 스스로를 두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도록 그분 자신의 의에 의해 매인 바 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인 그 의는 또한 우리 구원의 기초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가 흔들릴 수 있는가 ? 절대 그렇지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구원의 기초도 흔들릴 수 없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109).

의에 관한 네가지 정의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옳은 것이다 또 사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일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의와 엄격한 요구에 의해서 의로운 것이다. 의는 사람과 사물과 일들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의롭고 엄격한 요구에 의해서 의로운 것이다.

두 번째로 의는 생명 주는 영으로서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외적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표현이다. 에베소서 4장 24절과 (새사람, 곧 하나님을 따라 그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사람을 입은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 새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에 따라 온전한 지식에 이르도록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보라.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의는 하나님의 왕국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왕국이 의다. 시편 89편 14절을 (의와 정의가 주님의 보좌의 기초라 / 자애와 진리가 주님 앞에서 나아갑니다) 볼 때, 의가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라고 했다. 그러므로 의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행정, 다스림을 수반한다. 의라는 것은 질서 가운데 있어야 하고 머리삼는 문제를 포함한다. 네 번째로 의는 우리의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과 옳은 것이다. 우리의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과 의롭다는 것은 투명하고 수정과 같이 맑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속 존재가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화목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어야 한다.

— 고린도 전후서 결정연구 M6

이상

異象 vision

“이상”이라는 말은 특별하고, 이례적이며, 일반적이지 않고, 뭔가 기묘한 어떤 것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광경이나 경치라는 뜻도 있다. 그것은 특별한 일종의 봄이다. 사람이 보는 것은 어떤 광경이 있기 때문이다. 매우 아름다운 광경이 있을 때 카메라가 있다면 찍고 싶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은 특별한 종류의 봄이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영광스러운 이상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보는 대상이 영광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보는 자체를 영광스럽게 만든다. 영광스러운 이상이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다.

— 영광스러운 이상과 십자가의 길 8

인격, 위격

人格, 位格 person

삼일성의 신학적인 연구에서 ‘히포스타시스’ (hypostasis) 와 동등하게 사용된 라틴어 단어는 ‘퍼스나’ (persona) 이다. ‘퍼스나’는 영어 단어 'person' 의 어근이다. 이러한 단어는 세 방면의 하나님을 말한다.

— 그 영 19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주로 ‘외모’, ‘용모’, ‘사람’의 의미로 쓰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 그분의 ‘인격’ 으로 사용해도 무난하지만, 삼일성의 다른 경우에는 ‘人’이라는 것이 있어 꺼리게 된다. 로마서 강해로 유명한 Griffith Thomas 도 그의 저서 ‘The principles of theology' 라는 책에서 “... person 이라는 용어에도 역시 때때로 이의가 제기된다. 인간의 모든 언어와 마찬가지로 이 용어도 까딱하다가는 부적합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고, 적극적인 오류를 가져온다는 비난까지도 면할 수 없다. 이 단어는 결코 너무 강조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가 'substance' 나 'person' 이라는 단어를 어쩔 수 없이 쓰고는 있지만, 우리는 그 단어들이 우리가 아는 사람의 실질이나 인격과 동일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삼일성의 진리와 체험은 신학 용어에 달린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인성

人性 humanity

우리가 인성으로 번역하는 중국어 단어 「renger (렌거): 인격 (人格)」은 정의 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정의가 각각 다른 사전들과 어휘 목록들에 따라 그 정의들도 다양하다. 이 단어의 법률상의 정의는 사람의 지위와 권리들을 말한다. 법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인격」혹은 「인성 (humanity)」을 잃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그의 지위와 권리들을 잃는 것이다.

나의 체험과 관찰에 의하면 인성은 “사람의 어떠함”을 말한다. 어떤 사람의 내재적인 존재는 결국 사람들 앞에서 그 자체를 표현하는 하나의 모양이 된다. 영어에서 「렌거」에 해당하는 동의어를 찾기란 쉽지 않다. 가장 가까운 단어가 「개성 (personality)」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사람의 성격만을 말한다. 이것도 역시 사람의 어떠함과는 다소 다르다. 인성은 외적인 표현을 강조하는 반면, 개성은 내적인 본성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사람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어떤 방식이나 모양 가운데 외부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이 두 측면은 매우 밀접하다. 하나는 내부적이며 다른 하나는 외부적이다. 내적으로 그것은 개성이고 외적으로는 인성이다.

— 영광스러운 이상과 십자가의 길 43

인자

人子 Son of man

인자는 사람이지만 인자와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단순하여 아무런 관련이나 연관됨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을 방문하러 오셨을 때 그분은 인성안에 계신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죄인을 찾고 구원하러 오신 인자로서 (눅 19:10) 그분은 관련과 연관됨으로 충만되셨다. 시편 80편 17절은 사람과 인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두 용어 모두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인자로서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 포함되셨으며 심지어 이스라엘과 하나이셨다. 그러나 그분이 야곱과 씨름하러 오셨을 때 그분은 단지 사람이셨으며 아무런 연관이 없으시다.

—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결정연구 메시지 4

임재

‘임재’라는 헬라어 단어는 파루시아 (parousia) 로서 온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 분이 우리에게 오시지만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에 있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오늘밤 미국 대통령이 에너하임에 올 경우에 몇 사람만이 그의 임재, 곧 그의 파루시아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주 예수님이 오시겠지만 당신은 그분의 임재 안에 있을 만큼 가치가 있겠는가 ? 우리는 그분이 나타나실 때 그분의 임재 안에서 그분 앞에서 자신감과 담대함과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내적 기름부음에 따라서 주님 안에 거해야 한다.

— 창세기 L-S Ⅲ 90

그리스도의 임하심은 믿는이들과 함께하는 그분의 임재일 것이다. 이 임재는 그분이 공중에 오심으로 시작하여 그분이 땅에 오심으로 끝날 것이다. 그분의 임재 동안에는 대다수 믿는이들의 공중으로의 휴거 (살전 4:15-17), 그리스도의 심판대 (고후 5:10), 어린양의 혼인 (계 19:7-9) 이 있을 것이다.

입문

入門 initiation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출생이나 그분의 계보로 시작되지 않는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잉태와 출생으로 시작된다. 이것에 이어서 누가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계보를 제시해준다. 그렇지만 누가복음은 노예 - 구주의 입문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입문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취임 (inauguration) 이라는 단어와 의미가 동일하지만, 취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이유는 노예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사상은 의무와 위임 혹은 봉사 안으로 들어오시는 구주에 관한 것이다. 물론 ‘구주의 들어오심’은 어색하다. 중국어 회복역 번역자들은 입문이라는 단어를 웹스터 사전에 있는 첫 번째 의미를 따라서 단어를 번역해 놓아서, ‘시작 (the beginning) 이라는 단어로 번역해 놓았다. 어떤 일을 개시하거나 시작하는 것과 어떤 사람을 어떤 특정한 클럽이나 조직 안으로 입문시키는 별개의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새로운 그룹 안으로 입문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이 이끌리고 (brought in), 소개되고 (introduced), 안내되는 (conducted in)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그것은 구주의 시작이 아니라, 구주의 이끌리심과 소개되심과 안내되심인 것이다.

— 장로훈련Ⅲ

자아

自我

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타락되었다. 혼이 타락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반역적이 되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 주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그의 혼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9장 24절과 25절에서 ‘혼 생명’은 ‘자기’ 로 대치되는데, 이것은 우리의 혼 생명, 곧 혼이 우리의 자아임을 보여 준다. 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은 자아를 창조하지는 않으셨다. 혼은 타락되고 반역적이 됨으로써 자아가 되었다. 육체가 자아를 다스릴 때는 악한 인격이 되고 (롬 7:18-21 참조), 자아가 육체를 복종시킬 때는 선한 인격이 된다 (마 19:16,20 참조) 자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이며 (마 16:23-24), 혼 적인 생명의 체현이며, 사단과 하나이고, 생각 (의견화된 사상) 을 통해 표현된다. 자아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매일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필요하다. (봉사에 대한 기본 공과 268), 우리의 자아는 부인되어야 한다.

— 봉사에 대한 기본 공과 228

적심과 침투함

적신다는 것은 수직적인 어떤 것이지만, 침투한다는 것은 수평적인 어떤 것이다. 집회 안에서 말씀이 사역되고 있는 동안 인치는 영은 우리를 수직적으로 적시며 우리를 수평적으로 나누어주시는 하나님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한다. 그 영의 인침, 곧 그 영의 적심과 침투함은 우리 안에 계속적으로 일어난다. 이러한 인침은 우리 몸의 구속에 이르도록, 즉 우리 몸의 변형에 이르도록 계속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안에서의 인침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변형시키기 위해 수직적으로와 수평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내재적인 조망 22

전이

轉移 transfer

상태와 상황에 있어서 크게 바뀌는 것일 뿐 아니라, 본성과 요소와 본질에 있어서도 크게 바뀌는 것

...... 그러한 영화롭게 되심은 그리스도를 그분의 성육신의 단계로부터 마지막 아담이신 그 분이 부활 안에 생명주는 영이 되신 그분의 포함의 단계로 옮기는 전이임. (註 ;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심은 그분의 상태와 상황에 있어서 크게 바뀌시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본성과 요소와 본질에 있어서도 바뀌시는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 신성한 영광으로 영화롭게 되신 결과 메시지 2

전이에는 사실적이고 위치적인 전이와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전이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아담에게서 나오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분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사실적이고 위치적인 전이이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힘을 통해 육체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아담) 에서 나오고, 우리가 그 영과 연합됨을 통해 영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

— 로마서 결정 연구 메시지 2

제자됨

미국에는 인디언이 있다. 정부는 그들이 전형적인 미국인으로 전향하기 원한다. 행동, 태도, 표현, 모든 자세까지도 바뀌기를 원한다. 베드로는 겉으로 전형적인 유대인이었으며, 그의 관념은 온통 유대적이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를 따라서 어부가 되어 밤낮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았다. 어느 날 신성하고 비밀한 분이 오셨다. 베드로는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물과 아버지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은 그를 삼 년 반 동안 밤낮 훈련시키시어 하나님 - 사람과 똑같은 제자로 만드셨다. 유대인이 아닌 하나님 - 사람으로 만드셨다. 그는 사람이지만 어떤 신성한 것을 사는 사람이 되었다. 이 한 가지를 위하여 삼 년 반 동안 그분의 제자가 되는 훈련이 필요했다. 그의 관념까지도 바뀌어야 했다.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사람을 얻는 그런 사람으로 바뀌어야 했다. 나는 (위트니스 리) 회복 안에서 워치만 니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18년 동안 보았다. 나는 그를 따라 다니며 모든 것을 보았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제자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 사람이 되기 위하여 제자됨이 필요하다.

— 활력그룹 메시지 2,3

우리는 가서 침례를 줌으로 족속들을 제자 삼는다. 제자 (disciple) 라는 단어는 강한 단어이다. 제자들은 믿지 않는 민족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줌으로써 제자 삼을 수 있었다. 이것은 제자 삼는 것이 침례 주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침례주어 한 인격 곧 삼일 하나님 안으로 넣음으로 그들을 제자 삼아야 한다.

—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신성한 삼일성과 함께 삶 72

존귀

尊貴

영광은 하나님 자신이 표현되신 어떤 상태를 뜻하는 반면에 존귀는 높은 지위 특히 그러한 지위와 관련된 고상한 품위를 가리킨다

— 신약의 결론, 하나님 143

존귀란 예수의 가치, 값어치에 관련된 귀함 (베드로전서 2장 7절의 “보배”라는 단어는 히브리서 2장 9절의 “존귀”와 같은 헬라어 단어이다) 과 그분의 위치에 관련된 존엄함 (벧후 1:17, 롬 13:7) 이다. 하나님의 표현인 영광이 어떤 상태를 언급하는 반면 존귀란 높은 위치, 특히 그러한 위치에 관련된 존엄함을 말한다. 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승천한 분이신 그리스도는 영광의 상태 안에 계시며 존귀의 위치에 계신다.

—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495

종교

宗敎 religion

종교는 계명들에 의식들을 더한 것에 규정들을 더한 것으로서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종교는 그 영이 없이 하나님을 위해 어떤 것을 하거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포함한다.

종교는 우리의 인간 생활에 있어서 한가지 이상의 생활방식이 있는 것으로도 정의 될 수 있다.

— 온전케하는 훈련 Ⅲ 172

주의 만찬

주의 상 (床) 참조

주의 만찬은 주님의 누림을 위한 것으로서 주님의 만족과 주님의 기념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주로 주님과 믿는이들의 수직적인 방면을 나타낸 것이다.

주의 만찬은 주의 상을 포함하지 않지만, 주의 상은 주의 만찬을 포함한다.

— 만찬집회

주의 상

주의 만찬 (晩餐) 참조

주의 상은 우리의 누림을 위한 것으로서 참여를 위한 누림이고, 교통을 위한 누림이다. 이것은 주로 믿는이들간의 수평적인 방면을 나타낸 것이다.

— 만찬집회

지방 교회

地方 敎會 local church

지방 교회라는 것은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지방적인 성격과 교회의 표현에 대한 설명으로서, 지방에 있는 교회라는 의미이다. ‘지방 교회’ (local church) 라는 단어를 대문자로 쓰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우리의 이름이 ‘지방교회’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달이 어느 지방에서 보이든 다만 달이듯이, 교회도 어느 지방에 세워졌든 다만 교회이다.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졌을 때, 그것은 다만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로 알려졌으며 (행 8:1), 안디옥에 세워졌을 때도 다만 안디옥에 있는 교회였다 (행 13:1) 이와 같이 오늘날 한 지방에 있는 교회의 실질적인 표현은 다만 한 지방에 있는 교회이다. 지방에 있는 교회로서 우리는 참 하나의 입장 위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

— 진리의 변호와 확증 159

지혜

知慧

지혜는 영리함과 다르며 영리함보다 깊은 것이다. 지혜롭지 않으면서도 영리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범죄자는 매우 영리할지 모르지만 지혜가 절대 부족하다. 하나님은 매우 지혜로우시며 우주는 그분의 지혜를 나타낸다. 지혜와 지식의 차이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지혜는 지식보다 높고 깊은 것이다. 지혜는 어떤 것의 시초 예컨대 어떤 새로운 발명의 공식에서 볼 수 있고 지식은 실질적인 적용에서 볼 수 있다. 만일 지혜가 없이 지식만 있다면, 당신은 어떤 것도 시작하거나 발명 (창안)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유일한 기원자 (起源者) 이시다. 그분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로써 많은 것들을 시작하셨다. 그분이 이미 시작하신 것을 적용하려고 하실 때, 그분은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 보이신다. 오직 문제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지혜의 모든 방면들이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하나님께 문제와 곤란한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심지어 그분에게는 대적 사탄조차도 필요하다. 사탄이 없다면 하나님의 지혜가 충분히 나타내질 수 없다. 사탄은 하나님의 지혜가 각양 각색으로 나타내지도록 많은 기회들을 창출해내었다. 사탄의 반역은 하나님의 지혜를 위해 쓰이는 문제거리의 영역 속에 있을 뿐이다 (엡 3:10 참조).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시는 데에는 하나님 편에서 많은 지혜가 요구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으로 만드실 때 그분의 지혜의 많은 방면들이 나타난다.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하나님의 각종 지혜에 따른 것이다

— 신약의 결론, 하나님 114

cf “지혜의 말씀”은 우리의 분깃이 되도록 하나님이 예정하신, 하나님의 보다 깊은 것들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고전 1:24,30, 2:6-10) 으로서 주로 계시로 말미암은 우리의 영에 속한 것이고, “지식의 말씀”은 하나님과 주님에 관한 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전하는 말씀 (고전 8:1-7) 으로서 주로 가르침으로 말미암는 우리의 이해에 속한 것이다.

— 장로훈련 Ⅴ 82

진리

眞理

헬라어 ‘알레데이아’ (aletheia) 는 진리나 실재 (헛된 것에 반대됨), 진실, 정직, 참된 것, 성실 등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거룩한 말씀에 의해 담겨 있고 전달되고 열려지는 신성한 계시의 내용으로서, 신성한 경륜의 모든 실재들을 나타낸다.

— 요한일서 L-S 88

진리는 참되고 견고한 어떤 것, 즉 실제를 의미한다. 또한 단순히 실재일 뿐만 아니라, 실재의 표현을 의미한다. 진리는 공허한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실제의 표현, 실재로 구성되고 그 실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 창세기 L-S Ⅳ 218

우리에게 실재화되시는 하나님, 체험된 하나님이시다.

—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결정 연구

천국

天國 kindom of heavens - 하나님의 왕국 (kingdom of God) 참조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는 특별한 부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오늘날의 교회와 천년왕국의 하늘에 속한 부분을 포함한다. 천국은 실제 (롬 14:17) 와 외양 (마 13) 과 나타남 (마 24,25) 의 방면이 있다.

— 마 L-S

천년 왕국

千年 王國

그리스도께서 재림후에 왕으로서 세상을 통치하는 천년의 기간을 의미한다.

— 신약의 결론, 왕국

장차 올 천년왕국 안에 있는 새 예루살렘에서 생명나무이신 그분을 누리는 것은 오직 이기는 믿는 이들에게만 주는 보상이다.

— 계 2:7 각주

천연적인 힘과 능력

우리의 출생을 통해서나 배움을 통해 얻은 것으로서 그 안에 신성한 요소를 갖고 있지 않은 것.

천연적인 힘과 능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그 자신의 생각으로 행동하고, 그 자신의 영광을 구하며, 그 자신의 갈망을 만족케 한다. 이러한 천연적인 힘과 능력은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한다. 이것은 죄를 처리하는 것보다 더 크고 주관적인 공과이다. 그러나, 이러한 천연적인 힘과 능력은 십자가로 처리받는다면,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부활 안에서 유용하게 된다. (사도행전 7장과 출애굽기의 모세의 경우)

— 봉사에 대한 기본 공과 280

총명

prudence

지혜는 우리에 관한 어떤 뜻을 계획하고 목적을 정하기 위해 하나님 속에 있는 것이고, 총명은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로 계획하셨고 목적을 정하셨으며, 그런 다음 우리를 위해 계획하고 목적을 정하신 것을 총명으로 적용하셨다. 지혜는 주로 영원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것이었고, 총명은 주로 시간 안에서 그분의 계획을 집행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안에서 그분의 지혜로 계획하셨던 것을 지금 시간 안에서 그분의 총명으로 수행하고 계신다. 우리는 총명을, 보다 낮은 수준에 있는 영리함을 보다 높은 수준에 있는 지혜에 연결시키는 층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영리함에서 지혜로 올라가려면 총명이 필요하다. 어떤이가 지혜에 이르도록 전진하기 위해 자신의 영리함 속에 남아 있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그는 반드시 총명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또 우리는 총명을 합당한 영리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총명이 있는 사람은 어떤 일들을 어리석은 방법으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총명도 역시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있어서 신성한 속성이다.

— 신약의 결론, 하나님 116

총합

總合

그 영은 바로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총합이다. 그 영은 단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완성일 뿐 아니라 또한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총합이다. 완성은 그 분이 거치신 과정이 완성된 것을 가리키고, 총합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 이 셋이 더해진 총합을 가리킨다. 이제 그분은 아버지요 아들이며 또한 영이시다. 이 셋을 더한 총합이 바로 그 영이다.

—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된 영과 믿는이들의 거듭난 영의 연합의 결과 18

최고 수준의 도덕성

最高 水準의 道德性

최고 수준의 도덕성은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하나님과 인간적인 미덕들을 지닌 사람의 합성인 생명을 소유하신 분의 생활이다. 최고 수준의 도덕성을 말할 때, ‘도덕성’이란 전통적인 용어의 도덕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 하시는 생명의 수준을 의미한다.

— 누가복음 L-S 27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적인 미덕을 지닌 피조된 사람 (창 1) 에 모든 신성한 속성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생명 되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생명나무 (창 2) 을 더한 결과이다.

— 누가복음 L-S 70

축복

祝福

적극적 의미 - 생명 안에서 성숙한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넘쳐흐름

— 창Ⅳ 314

축복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은혜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생명까지도 잃었을 것이다. 축복이란 번창이요 이익이요 상여금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사용하는 은혜라는 말들은 사실 축복에 해당하는 말이다. 성경에서 은혜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누림이 되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구약에는 주로 축복이 있지만 신약에서는 물질적인 축복이 영적인 축복 (은혜) 로 대치된다. 축복은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은혜는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를 위한 것이다.

— 창세기 L-S Ⅱ 283

축복과 은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값없이 주실 때 그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이 축복이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은혜가 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겠다고 그에게 약속하셨다. 축복이 아브라함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것은 은혜가 되었다.

— 창세기 L-S Ⅲ 211

충만

充滿

풍성의 넘쳐 흐름, 풍성의 표현

— 골 1:19, 2:9 참조

충만은 풍성에서 나온다. 우리가 그 풍성을 먹고 소화시키지 않으면, 충만이 없이 풍성 그대로 있다. 풍성을 먹고 소화를 시킴으로 충만을 낳는다. 같은 식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일 뿐 아니라 충만, 그 표현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림에서 나온다.

— 성경의 기본계시 68

예를 들어 어떤 유리 항아리에 맛있는 사탕이 몇 개만 들어 있다면, 그 항아리에는 사탕의 풍성이 약간 있을 뿐이요, 충만함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항아리를 사탕으로 가득 채운다면, 그 항아리는 풍성뿐만 아니라 충만을 갖게 될 것이다. 항아리가 부분적으로 채워진 채로만 있다면, 항아리에는 사탕의 표현은 없게 될 것이다. 충만은 표현이기 때문에 충만이 없다면 표현도 없게 된다. 충만은 풍성의 완성이다. 헬라어로 ‘충만’이라는 단어는 완성의 의미가 있다.

— 에베소서 L-S 319

칭의

稱義 justification

칭의란 하나님의 의의 표준에 따라서 사람들을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표준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이며 우리의 의가 아니다. 우리의 의의 표준으로는 우리 자신을 의롭다 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표준에 따라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믿음에 의한 칭의란 우리가 하나님의 의의 표준에 따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칭의가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 로마서 L-S 64

토대

土臺 base

새 예루살렘은 정금산은 그 성의 토대이다. 어떤 사람들은 ‘base(토대)’라는 단어 대신에 ‘site'(터) 라는 단어를 선호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흔히 건축의 터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터는 그 위에 건조되는 건물보다 그 범위가 클 수 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과 관련하여’토대‘대신’터‘를 사용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거룩한 성은 정금산 전체를 차지하며, 이 산 위에 새 예루살렘이 건축된다. 사실상 정금으로 된 성 새 예루살렘에는 터가 없고, 정확히 말해서 토대가 있을 뿐이다. 다른 이들은’토대‘라는 단어 대신에’기초 (foundation) 또는 ‘지반’ (ground)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자고 할 지 모른다. 그러나 계시록 21장 19절부터 20절에서 새 예루살렘 성에 열 두 기초석 (foundation) 이 있음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기 때문에, ‘토대’ 대신 ‘기초’ 를 사용하는 것은 오류가 될 것이다. ‘지반’ (ground) 이라는 단어는 ‘토대’와 의미상 매우 가깝지만 서로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토대’ (base) 라는 용어가 최상이다. 새 예루살렘의 문들과 성곽은 그 토대인 정금산 위에 건축된다.

— 하나님 - 사람들 76

평강

은혜의 결과로 온 상태, 즉 은혜를 누린 데에서 나온 상태를 말한다. 은혜는 본질이요, 평강은 상태이다 (에베소서 L-S 18).

우리의 체험에서 평강은 은혜로부터 나오는, 즉 아버지 하나님을 누리는 누림으로부터 나오는 상태이다. 하나님을 은혜로 누릴 때 우리는 안식과 만족이 충만한 상태에 있게 된다. 이것이 평강이다. 은혜의 본질은 하나님 자신이고, 평강의 상태는 우리가 은혜이신 하나님을 누리는 데서 나온다. 우리는 신성한 본질을 우리의 누림으로 갖고 있고, 하늘에 속한 상태를 갖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평강이다.

— 신약의 결론, 하나님 133

표적

표적이란 특별한 의미를 가진 상징이다. 요한복음은 기적의 책이 아닌 표적의 책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기적들을 읽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기적”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는다. 그 대신 이 복음서는 표적들에 대하여 말한다. 예를 들어,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은 (요 2:7-11) 일종의 표적이라 불리운다 (11절). 이 복음서에 있는 또 다른 표적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것이다. (요 6:9-14)

—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540

한마음 한뜻

同心合意 one accoard

한마음 한뜻 (동심합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호모 쑤마돈 (homothumadon) 은 강하고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 ‘한마음 한뜻 (one accord)’라는 말은 마태복음 18장 19절의 ‘합심하여 (agree)’라는 단어보다 강하다. 호모 (homo) 는 동일한 것을 의미하며, 쑤모스 (thumos) 는 생각, 뜻, 목적 (혼, 마음) 을 의미한다. 중국어 번역성경은 이 단어를 동일한 생각과 동일한 뜻을 의미하는 중국어 단어로 번역한다. 흠정역은 로마서 15장 16절의 이 단어를 ‘한 생각’ 으로 번역한다. 사도행전에서 백 이십 문도는 한 생각으로, 동일한 생각으로, 혼과 마음의 둘레와 그 안에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동일한 뜻으로 함께 기도했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물론 영을 사용해야 하지만, 우리는 또한 우리 혼과 마음의 둘레와 그 안에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동일한 생각과 동일한 뜻 안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전 존재가 관련됨을 의미한다. 그들이 한마음 한뜻 안에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전 존재가 하나였음을 의미한다.

— 장로훈련Ⅷ

하나

oneness

하나 (oneness) 는 연합 (unity) 와는 다르다. unity 란 많은 사람들을 함께 결합시켜서 형성되는 것인 반면에 하나란 믿는이들 안에서 그들을 모두 하나로 만드는 그 영의 실체이다.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종류의 Unity 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Unity 보다 하나를 귀하게 여긴다.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연합된 것 - 어떤 종류의 연합체를 형성한 것 - 이 아니라 하나이다.

— 에베소서 L-S 335

하나님 - 사람

God-man

하나님 - 사람의 동의어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요한복음 1:12-13절과 로마서 8:16절의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 - 사람과 동의어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종류이다. 사자 종류가 있고, 늑대 종류가 있고, 호랑이 종류가 있다. 이 종류라는 말은 왕국으로 바꿔 쓸 수 있다. 사자의 왕국, 호랑이의 왕국, 늑대의 왕국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왕국이라는 말은 통치한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더욱 유기적인 영역인 그 종류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보는 것은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작은 사자 새끼로 태어난다면, 아무리 작다 해도 사자의 왕국을 이해할 수 있다.

— 하나님 - 사람의 생활 메시지 33

로마서 1장 4절은 그리스도가 첫 번째 하나님 - 사람이심을 명백하게 나타내 준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근원을 본다. 한 근원은 육신이요, 또 하나의 근원은 성결의 영이다. 두 요소가 있다. 육신은 인성을 말하는 것이고, 성결의 영은 신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본성을 가진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첫 번째 하나님 - 사람이시다. 그 분이 원형이시다. 대량 생산의 첫 번째 원형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하나님 - 사람들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종류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라는 것은 육의 종류라는 것이다. ‘그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는 두 영이 같은 종류인 것을 나타낸다. 당신이나 당신의 부모나 같은 종류이다. 우리는 많은 하나님 - 사람들이며 우리의 주님은 첫 번째 하나님 - 사람이시다. 로마서 8장 16절에서 ‘그 영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나니’라고 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 사람과 동일한 것이다.

— 하나님 - 사람의 생활 메시지 3

하나님의 왕국

kingdom of God - 천국 (kindom of heavens) 참조

영원 과거부터 영원 미래까지 이르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통치

— 신약의 결론, 왕국

하나님께 택함받은 사람들인 그분의 믿는이들 안으로 심겨진 생명의 씨인 구주, 곧 주 예수님 (막 4:3, 26) 이신데, 하나님이 그분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 그분의 왕국으로 다스리시기 위한 영역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그것의 입구는 거듭남이요 (요 3:5), 그것의 발전은 믿는이들이 신성한 생명 안에서 성숙하는 것이다 (벧후 1:3-11) 그것은 오늘날 교회생활인데, 그 안에 신실한 믿는이들이 살고 있으며 (롬 14:17), 그것은 천년왕국에서 이기는 성도들에게 주는 (계 20:4,6) 유업의 상이 되는 장차올 왕국 (갈 5:21, 엡 5:5) 으로 발전될 것이다. 결국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모든 구속된 자들이 영원히 누리기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 곧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성된다. (계 21:1-4, 22:1-5, 14)

— 사도행전 L-S

합병

合倂 incorporation

합병은 적어도 셋 이상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것이 합병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경륜안에서 계획한 것이 완결된 삼일 하나님과 택함받고 구속받고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화롭게 된 그분의 모든 백성과의 합병이다.

성경 전체의 역사를 볼 때 그 역사의 최종 완성의 결과는 커다란 합병체이다. 연결 (union) 은 생명에 속한 유기적인 것이고, 연합 (mingle) 은 요소들의 섞임이며, 합병은 인격과 관계된다. 새 예루살렘은 계시록 21장에서 하나님의 장막으로 불리웠다. 그러므로 장막은 새 예루살렘의 표징이고 새 예루살렘은 장막이다. 계시록 2장에서 주님은 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감추인 만나를 먹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감취었던 만나가 바로 장막안에 합병되는 것이다. 감추인 만나는 그리스도이다. 감추인 만나인 그리스도가 장막의 중심이시다. 감추인 만나는 금항아리속에 있다. 금항아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의미한다. 금항아리는 금으로 씌운 조각목으로 된 언약궤 안에 있다. 이 언약궤는 신성과 인성을 포함한 그리스도이다. 이 언약궤는 지성소안에 있다. 지성소는 오늘날 우리의 영이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며 또한 아들은 지성소의 실제라는 것이다.

여기에 네 개의 ‘안에’가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20절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믿는이들은 아들 안에, 아들은 믿는이들 안에, 그리하여 모두 안에 실제의 영이 내주한다. 그러므로 장막 안으로 합병된 것이다. 감추인 만나를 먹음으로 장막안으로 합병되는 것이다. 먹을수록 더 합병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우주적인 합병체이다. 하나님의 장막인 새 예루살렘은 우주적인 합병체이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는 ‘그날에는 - 알리라’고 했는데, 그 날은 주님의 부활의 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영화롭게 되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모든 믿는이들을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결 안으로 이끌어 완 결되신 하나님과 연합되어 합병체가 되었다. 이 합병의 세 방면이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집과 포도나무와 그 영의 아이이다.

삼일 하나님은 자신이 바로 합병체이다. 이 신성한 합병체가 아들의 영화롭게 되심으로 말미암아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합병체가 되었다. 결국 새 예루살렘은 삼일하나님과 모든 믿는이들을 포함하는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우주적인 합병체가 될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 신성한 영광으로 영화롭게 되신 결과

합병이라는 것은 연결과 친밀한 연합의 문제이다. 합병되는 것은 친밀하게 연결하는 것이고, 섞는 것이고, 결사시키는 것이고 (coporate), 철저히 연합시킴으로 하나의 전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 고린도전후서 결정 M2

cf. 연결 -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을 사람의 생명 안으로 흘러보내는 생명의 일임

연합 - 신성한 본성과 사람에 속한 본성의 연합인 본성의 일임

합병 - 세 인격 이상이 상호 내재하고 하나로서 함께 일하는 인격의 일임

형상

形狀 image

형상은 물질적인 형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미덕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미덕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성분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속성과 미덕으로 충만하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속성과 미덕 안에 있는 그분의 모든 것의 표현이신데, 이 표현이 형상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그분이 소유하고 계신 속성과 미덕을 소유하도록 지으셨음을 의미한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으로 곧 그분의 속성과 미덕을 따라서 사람을 창조하셨으므로 사람은 이러한 속성과 미덕을 통하여 그분을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랑이 있으시며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이 사랑이 있고 사랑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생각하실 수 있고, 고려하시고, 사랑하실 수 있고, 선택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도록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렇지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속성과 미덕의 형상에 불과하며, 실제는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그의 생명과 내용으로 영접해야 한다. 그러면 속성과 미덕을 가진 하나님이 사람의 속성과 미덕의 실제가 되기 위해 사람을 가득 채우실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담고, 그리스도를 사람의 내용이 되게 할 목적으로 그분의 형상 곧 그리스도를 따라 사람을 만드셨다

— 생명에 대한 기본 공과 26

성경에서 말하는 형상은 밖에서 볼 수 있는 형상이 아니라 볼 수 없는 성정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지으셨는데 아 형상은 밖의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안의 성정을 말하는 것이다.

— 내주하는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함 72

형상을 본받음

형상을 본받는 것은 생명 안에서의 믿는이들의 변화의 최종 완성이며 또한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 곧 하나님 -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은 믿는이들이 하나님 - 사람으로서 생명 안에서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통하여 범사에 그분의 죽음을 본받는 것이며 (빌 3:10) 하나님 -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을 통하여 그분을 확대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빌 1:19-21) 이것은 하나님 -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복사판이 되는 것인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그분과 똑같이 되기 위한 것이다. (요일 3:2)

— 하나님의 구원의 유기적인 방면 86

형상을 본받음은 또한 믿는이들의 몸이 변형되어 영화롭게 되기 전의 예비임

—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된 영과 믿는이들의 거듭난 영의 연합의 결과 메시지 3

형체

形體 form - 빌립보서 2:7, 8

빌립보서 2장 7절, 8절에는 형체 (form) 와 모양 (likeness) 과 모습 (fashion) 이 나온다. 이 세 단어는 동의어가 아니라, 각각의 단어에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형체는 밖의 외관으로서 내적인 실제를 포함한다. 형체는 내적인 실제를 포함하고 있는 밖의 외관이다.(ex, 한 필의 말에는 말의 형체가 있으며, 말의 외관이 있다. 그러나 가짜 말은 말의 형체만 있을 뿐, 내적인 실제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사람들의 모양이 되셨다. ‘사람들’은 인류를 의미한다. 사람들의 모양은 그분의 인성의 외양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또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모습은 밖의 형태, 곧 외형이다. 모양과 모습은 거의 같지만, 모양은 일반적인 것이다. 주 예수님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인류의 모양이 되셨지만, 또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사람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모양을 갖고 계셨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관찰하고서 그분을 이야기 했다. 그분을 관찰 함으로서 사람의 모습안에서 그분을 발견했다. 인성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어떠함은 사람들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처럼 ‘모습’이라는 말은 ‘모양’이라는 말보다 더 특별한 용어이다.

— 사람 안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이심 42

혼 생명을 잃는 것

혼생명을 잃는 것은 혼으로 하여금 그 즐거움의 상실로 고통받게 하는 것이다

사람 - 구주를 따르는 자들이 그들의 혼으로 하여금 이 시대에 즐거움을 가지게 한다면, 오는 왕국 시대에서 그들의 혼은 즐거움을 상실하고 고통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혼으로 하여금 이 시대에 사람 - 구주를 위하여 즐거움을 상실하고 고통받게 한다면, 그들의 혼은 오는 왕국 시대에 그 줄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땅을 다스림에 있어서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다. 마 25:21,23)

— 누가복음 L-S 182

혼합

混合 mix (mixture 혼합물, 혼잡물)

‘섞다’라는 뜻으로 가장 일반적인 말로서 혼합 결과 각 요소가 (대체로) 같은 것이 되는 경우에 쓴다. 원래의 각 요소가 식별되기도 하고 식별되지 않기도 한다.

예) 세상과 혼합된 천주교

이것은 콘스탄틴 대제가 4세기 초에 교회를 세상과 혼합했을 때 발생했다. 그는 수많은 거짓 신자들을 기독교 안으로 들어오게 함으로써 더 이상 교회가 아닌 기독교계가 되게 했다.

— 마태복음 L-S 465

그러나 야고보는 혼합된 사람이었다. 그의 서신에서 그는 거듭남과 그 영의 내주하심에 관해 말했지만, 자기 수양의 영역 안에 있는 완전함에 대해서도 역시 이야기했다. 이것이 감추인 혼합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점에서 야고보와 같다. 우리는 혼합된 사람들이다. 천연적인 사람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완전해지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행한다.

— 야고보서 결정연구 95

화목

和睦

화해는 주로 죄문제를 해결하지만, 화목은 죄는 물론 원수된 것을 해결한다. 그러므로 화목은 화해를 포함하는 말이다. 화해는 죄를 위한 것이지만, 화목은 죄와 원수됨을 위한 것이다. 화목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며 (롬 5:10,11), 하나님의 칭의를 거쳐서 이루어졌다 (고후 5:18-19). 그러므로 화목은 칭의로 얻어진 구속의 결과이다.

— 로마서 L-S 69

화해

和解

구약에 나타난 죄값에 대한 보상은 신약에 나타난 화해의 예표였다. 화해는 신약에서 적어도 다섯 번이나 나타나 있다.

첫째는 힐라스모스 (hilasmos) 라는 단어로서 ‘화해 시키는 것’, 즉 화해의 재물을 의미한다. 요한일서 2장 2절과 4장 10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친히 화해 제물이 되셨다고 했다. 이 두 구절에서 화해 제물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화목의 제물’ 로, 바쳐져야 할 제물을 의하는 말이다.

둘째는 힐라스테리언 (hilasterion) 이라는 단어로서 히브리서 9장 5절과 로마서 3장 25절에서 발견된다. 이 단어는 화해의 제물이 바쳐지는 장소를 의미한다.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 인역에 의하면 이 단어는 출애굽기 25장과 레위기 16장에 있는 시은좌에 대한 말이다.

셋째는 힐라스코마이 (hilaskomai) 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명사 힐라스모스 (hilasmos) 의 동사형으로서 히브리서 2장 17절에서 사용 되었다.

신약에서 이 다섯 군데 이외에도 누가 복음 18장 13절에서 성전에서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중에 “하나님, 이 죄인과 화해하여 주십시오.” (우리말 성경은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되어 있다) 라는 말이 나온다.

헬라어로 힐라스모스 (hilasmos) 라는 단어는 내가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으니 이제 나는 당신에게 빚을 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화해란 잘못을 저질러 빚을 지게 된 측에 대한 요구 사항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속죄란 쌍방을 하나로 이끄는 것이다. 갈라져 있는 쌍방이 하나가 되고자 할 때 화해의 필요성이 있다. 이것이 속죄이다. 즉 화해의 행위가 속죄인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죄라는 담이 있었고 하나님의 요구 사항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화해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서 화해의 제물로 바치심으로 이것을 이루신 것이다.

— 로마서 L-S 68

회개

悔改

하나님의 복음으로 말할 때 우리의 죄는 확실히 하나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모두 사람들로 회개하도록 할 것이다. 사람들 역시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회개하여야 한다. 그러나 다만 이러한 이해는 너무나 천연적인 것이다. 복음 진리의 빛으로 볼 때, 죄가 없는 사람도 여전히 회개하여야 한다. ‘회개’의 원문의 의미는 회개하는 데 중점이 있지 않다. 당신이 죄를 범하고 잘못하였으니 후회하고 바로 잡으라는 말이 아니다. 당신이 한 일이 죄와 관계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당신은 사후에 후회하고 또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매들은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사고 어떤 때는 회개한다. 그러나 물건을 산 것이 죄를 범한 것과는 무관하다. 원문에서 ‘호개’라는 단어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부분의 뜻은 ‘고치다’이고, 다른 한 부분의 뜻은 ‘생각’ 으로, 합치면 ‘마음이 바뀜’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곧 마음이 바뀌는 것으로 후회하여 목표를 옮기는 것이다. 회개의 의미는 바로 사람 속의 부정확한 생각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그렇게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그들은 도덕이 사람의 목표이고 인생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사람의 목표요 사람의 중심과 의미이며, 하나님이 마땅히 사람의 내용이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성경은 하나님이 도덕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었다고 말한다.

— 주 안에 거하며 주의 생명을 누림 74

회복

回復 recovery

‘회복하다’라는 말은 잃어버렸던 어떤 것을 다시 얻거나, 어떤 것을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을 의미한다. ‘회복’은 손상 또는 손실이 발생한 후에 정상적인 상태로 복원하거나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들을 회복하고 계신다고 말하는 것은, 교회 역사의 과정 중에서 그것들이 잃어버린 바 되었거나, 잘못 사용되었거나, 타락되었지만, 하나님이 그것들을 원래의 상태나 지위로 복구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 진리의 변호와 확증 148

주님의 회복의 첫 번째 방면은 하나님의 계시이고, 두 번째 방면은 하나님 - 사람의 생활이며, 세 번째 방면은 교회의 실행이다.

—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된 영과 믿는이들의 거듭난 영의 연합의 결과 메시지 6

희년

稀年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에서 그리스도는 은혜의 희년을 선포하신다. “주의 은혜의 해”란 용어는 레위기 25장에 기술된 희년을 의미한다. 이 장에 따르면 희년은 종들이 해방되고 기업이 권리를 가진 본 주인에게로 돌아오는 때이다. 그러므로 희년은 해방의 해, 자유의 해, 잃어버렸던 기업으로 돌아오는 해였다. 노예로 팔렸던 사람들은 희년 동안에 해방되었다.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좋은 땅을 분깃으로 받았다.

그러므로 좋은 땅의 권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권리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타락한 모든 사람은 생명나무이신 하나님을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잃어버렸다. 더 나아가서 타락한 모든 사람은 자신을 죄, 세상, 사탄에게 팔았다.

그러므로 타락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잃었으며 그들 자신을 소극적인 것들에게 팔았다. 그러나 희년은 우리가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고 우리의 분깃인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회복할 수 있음을 가리키다. 사역을 시작하실 때 그리스도는 희년,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다. 이것은 전 신약시대가 사실상 단 한 해, 희년의 해, 여호와께서 타락한 사람들을 받아들이시는 해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희년의 선포는 참된 복음, 풍성하고 완전한 복음이다.

사람들에게 그들은 죄인들로 지옥에 떨어질 운명이었으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분을 믿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은 복음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것은 희년의 한 부분일 뿐이다. 희년은 노예됨에서 해방과 우리의 영적인 장자권이 회복되는 것을 전파하는 것이다. 희년에 우리는 우리의 분깃이신 삼일 하나님에 대한 누림을 회복한다. 잃어버렸던 우리의 장자권은 신약의 희년 때에 회복되었다. 희년에 우리는 또한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우리는 포로들이었으나 속박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로 다시 인도되었다.

레위기 25장에 따르면 희년 때에 모든 사람들은 각기 그들의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신약 시대는 참된 희년이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원래의 상태로 우리를 돌아오게 하실 것임을 의미한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되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게서 종으로 팔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며 주님의 은혜의 해를 가져오셨다. 신약 안에서 이 은혜의 해는 구약의 희년을 성취한 것이다. 이 해에 우리는 해방되었으며 우리의 잃어버린 바 되었던 장자권이 회복되었고, 구속되었고, 되돌아왔다.

—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182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